The Voice of Korean American reaches to D.C.
김동석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 대표
인터뷰 – 황은미 변호사 글.편집 – 김지원 에디터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끊임없이 다양한 한국 문화 예술 콘텐츠가 전세계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요즘. 이러한 케이 컬쳐(K-Culture)의 인기는 미 전역의 한국인들에게 큰 위로와 자부심이 되어주고 있다. 케이 컬쳐의 높은 위상이 미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가 되고 있다면,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은 미주 한인 모두의 삶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끼칠 중대한 영향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난 30년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워싱턴 의회에 한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를 맘앤아이가 집중 조명했다.
김동석 – 사회 활동가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 KAGC) 김동석 대표는 1996년 뉴욕, 뉴저지를 기반으로 한인들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한 비정파, 비영리 기관인 시민 참여 센터 KACE (당시 한인 유권자 센터)를 설립한 사회 활동가이다. 2007년 미 의회 위안부 결의안 통과, 한미간 비자 면제 프로그램 실시 등 굵직 굵직한 사안들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 뉴욕으로 유학을 온 김 대표는 어떤 계기로 미국 내 한인들의 힘을 결집하는 일을 시작했을까? 그는 1992년 LA 흑인 폭동을 그 시작으로 꼽았다. LA 폭동으로 한인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이 하루 아침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이 일에 뛰어들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뉴욕에서 뭉쳤고, 사회활동가로서 그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그 시발점이 된 시민 참여 센터는 현재 지역 단위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 김동석 대표가 담당하는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는 연방 단위 업무에 주력하고 있다.
미 정치 관련 한국 언론들의 인터뷰 1순위
김동석 대표는 한인 사회에서도 유명하지만, 미 워싱턴 관련 현안이 있을 때마다 한국의 미디어들이 제일 먼저 찾는 한국 미디어 인터뷰 1 순위이다. 김 대표만큼 워싱턴 의회를 자주 드나들며 정가 현안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20여 년 전만 해도 해외 동포들을 이등 시민 취급 하던 한국 정부가 2007년 위안부 결의안 및 한미간 비자 면제 프로그램 통과 이후 동포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2017년 개봉하여 백상 예술 대상, 대종상, 청룡 영화상 등 대한민국 유수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쓴 나문희, 이제훈 주연의 영화 <I Can Speak>에 카메오로 출연한 그는 영화 출연으로 알아보는 한국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겸손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새해 목표는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
미국 내 무국적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한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는 현재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가 최우선 해결 과제로 삼고 있는 새해 핵심 목표 사안이다. 2022년 1월 11일에서 13일까지 2박 3일간 워싱턴 DC에서 2년 만에 개최되는 연례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KAGC) 전국 컨퍼런스에서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 문제가 다루어질 예정이다. 김 대표는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최소 1만 5,000명 정도가 한인으로 추정된다”며 인권 사각 지대에 놓인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안 통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전쟁 직후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을 포함하여 각국에서 많은 입양아들을 받아들였으나, 그 중 상당수의 가정이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1년 정도로 다소 오래 걸리는 시민권 취득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좋은 부모를 만난 입양아들도 있지만 입양 지원금에 눈이 멀어 덜컥 아이만 받아 놓고 제대로 양육하지 않거나 학대를 한 사례도 빈번했다.
김 대표는 4살 무렵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한 남성의 사연을 소개했다. 미국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백인 부부에게 입양이 되었는데 그 부부는 집에서 기르던 커다란 덩치의 개와 아이를 싸움시켰다고 한다. 커다란 개가 물고 할퀴는 게 너무 힘들고 무서웠던 아이는 입양된 집에서 가출해 40대가 된 지금까지 신분 없이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2000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와 같은 무국적 입양인 문제 해결을 위해 ‘소아 시민권법’을 통과시켰으나 그 적용 대상이 2001년 2월 기준, 만 18세 미만으로 제한하여 이미 성인이 된 수많은 입양인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김대표가 추진하는 이번 ‘입양인 시민권’ 법안은 ‘소아 시민권법’ 제정 당시 성인이였던 입양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열정과 냉정사이
김대표는 연방 상하원 의원들을 직접 만나 이 같은 무국적 입양인들의 사례를 들려주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법안 통과는 의원들의 공감을 얻는 것과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마음에 호소하는 열정과 법안 통과를 위한 냉정한 전략이 함께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김 대표는 “공화당이 입양인 국적 문제를 이민 현안으로 보게 되면 통과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민이 아닌 인권 문제라는 점을 내세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극화된 미 정치 지형을 고려할 때 한인 유권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민주당 의원들 위주로만 입법 로비를 할 경우 공화당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공화당 지지 의원 확보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주 한인 유권자 연대는 입양인 권익 운동, 홀트 인터내셔널 등 20여 개 단체와 ‘입양인 평등권 연대(NAAE)’를 꾸려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KAGC에 따르면 지난 3월 애덤 스미스 (민주·워싱턴)와 존 커티스(공화·유타) 하원 의원이 공동 발의한 입양인 시민권 법안에는 12월 14일 현재 58명이 지지 서명했다. 로이 블런트(공화·미주리) 상원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원 법안에도 11명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
아내 황현주 그리고 고 김근태 의장..
김 대표는 자신의 아내를 ‘내 인생의 선생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배우자 황현주씨는 실제로 뉴저지 한국 학교 교장이자 패터슨 공립 학교 교사로 25년째 교직에 몸을 담고 있다. 김동석 대표가 유학생으로 뉴욕에 도착한 첫 날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 황현주씨라고 했다. “뉴욕에 도착 당시 1985년 남영동 고문실에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며 갇혀 있는 김근태 석방 운동으로 각종 미국의 인권 단체들을 쫓아다니며 열심히 활동하는 1.5세 여학생이 있었어요. 그 여학생이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대학에 막 입학했을때부터 김근태 의장이 주도하는 민주화운동에 가담했습니다. 학부시절에 운동권 학생으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왔거든요. 사실, 김근태 식구나 마찬가지죠. 아내와는 그런 인연이 있었어요. 격동의 시대가 짝을 만든 거죠. 벌써 35년이 훌쩍 지났네요. 처음 만났을 때 무척 똑똑했던 그 여학생한테 그렇게 빠져들었어요.”
“저희에게는 외동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김솔인데요. 저희는 솔이가 엄마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물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에요. 제 아내가 저를 다른 길로 가지 않게 막아준 캐치 프레이어가 바로 ‘시대정신 안에 살자’였어요. 더 나이를 먹고 인생을 돌아봤을 때 ‘우리가 시대정신 안에서 어떻게 살아있었나, 그 근거는 있어야 하잖아’라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실은 제가 음악과 미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인데 저를 제 역할을 하도록 적절하게 옆에서 잡아주고 격려해 온 저의 선생님 같은 존재가 제 아내입니다. 저는 이민 1세, 황현주씨는 1.5세 그리고 올해 만 30세를 넘긴 아들은 2세인데요. 한 집안에 1세, 1.5세, 2세가 있다보니 사회 이슈에 관한 논쟁이라도 붙게되면 밤을 꼬박 세워야 합니다. (웃음)”

겨울이면 김동석 대표의 마음에 그리움으로 찾아오는 이가 있다. 앞서 이 부부의 인연과 맞닿은 고 김근태 의장이 그 주인공이다. 김 대표는 그가 20대 대학생 때부터 믿고 따르던 고 김근태 의장의 가장 가까운 후배이며 고 김 의장이 2011년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고 김의장의 측근이다. 2001년 1월에 포트리에 한인 유권자 센터를 막 오픈했을 때 고 김근태 의장은 “미국 내 한인들이 좌우 이념을 초월해 결집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워싱턴에 한인들의 근거지를 만드는 일은 누가 하든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 말은 고 김근태 의장이 김동석 대표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하다. 2021년 12월. 고 김근태 의장이 세상을 떠난지 10주기를 맞았다. 하늘에서 고 김의장이 지금의 김동석 대표를 지켜본다면 환한 미소로 큰 박수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