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 매거진 X 규수 리 인터뷰

디자인, 공간, 그리고 삶의 이야기

글 | 더 앰 매거진 편집부

뉴욕의 어느 아침, 부드러운 햇살이 스튜디오 창을 통해 스며들던 그 날, 규수 리 씨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더 앰 스튜디오를 찾아주었다. GUCCI, Ralph Lauren, Pfizer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의 공간을 설계해 온 그녀는 단순히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범주를 넘어서는 깊이와 폭을 지닌 크리에이터였다.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시작된 대화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마무리되었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그녀가 설계한 공간만큼이나 따뜻하고 세심한 그녀의 ‘삶의 설계’를 엿볼 수 있었다.

1. 패션 디자이너의 꿈, 공간 디자이너로 피어나다
“디자인이란 결국 ‘나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규수 리의 디자인 여정은 어린 시절 인형 옷을 만들며 시작되었다. 어머니께서 손수 떠주시던 니트옷과 모자를 보며 자란 그녀는 어릴 적부터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었고, 자연스럽게 창작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꿈을 좇아 미국으로 이주한 후, Parsons, FIT, Pratt Institute에 모두 합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는데, 프랫(Pratt Institute)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단순히 공간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예술”이라는 이 말에 깊이 이끌려, 그녀는 주저 없이 공간 디자인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어릴 적 패션을 통해 다져온 미감과 창의성은 오늘날 그녀의 공간 디자인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2. 브랜드와 함께하는, 기억에 남는 공간들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협업 가운데 규수 리 씨가 인생 프로젝트로 꼽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40층 이상의 두 건물을 연결해 하나의 사옥으로 재설계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다. 단순한 구조 변경을 넘어, 기업의 정체성을 담은 공간 재해석 작업이었다. “2년간 여러 팀과 협업하면서 공간의 조화를 고민하는 순간이 정말 도전적으로 느껴졌어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녀는 공간 디자인이 단순한 미적 설계가 아니라, 기업 문화를 시각화하는 중요한 작업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할리우드의 광고 및 영화 산업과의 협업이었다. 크리에이티브한 집단과 나란히 일하며 공간을 설계하는 건 그녀에게 무척 신선한 자극이었다. “광고 감독, 영화 프로듀서들과 직접 소통하며, 공간이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3. 그녀만의 디자인 철학: 디테일은 사람을 향한다
“예쁜 디자인이 전부는 아니에요.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 진짜 좋은 디자인이죠.” 그녀의 철학은 ‘디자인은 기능과 감성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그녀는 단순히 보기 좋은 것보다, 사용자가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느끼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부엌 디자인에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전자레인지를 서랍식으로 배치했던 경험이 그녀에겐 있다. 그러나 요통이 있는 사용자가 그 구성이 불편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후 그녀는 디자인할 때마다 “사용자의 하루를 따라가 보는 상상”을 한다고 전했다

4. 뉴욕이라는 정글에서 다시 일어서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뉴욕 생활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긴장이 있다. 그녀도 불경기로 인한 정리해고라는 시련을 겪었다. “대학 시절부터 쉼 없이 달려왔는데, 그 결과가 해고라니…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갔죠.” 그러나 그녀는 좌절 대신 하루를 계획하고, 유화를 그리며 자신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녀에게 더 강한 자존감을 선물했다. “해고는 끝이 아니에요. 전환점일 뿐이죠.” 이 말에는 그녀의 단단한 내면의 힘이 담겨 있었다.

5. 패션과 공간, 두 디자인의 공통 언어
GUCCI, Ralph Lauren 등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은 그녀에게 ‘디자인 언어의 확장’을 의미했다. 또한 공간은 브랜드의 세계관을 오롯이 담아내는 무대이자, 소비자와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라고 여긴다. “패션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공간은 수년, 수십 년간 브랜드의 메시지를 전달해요.” 그녀는 공간 속에 브랜드의 이야기와 감성을 구조화하는 작업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6. 지속 가능성, 아름다움 그 너머의 가치

LEED 인증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친환경 디자인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속 가능한 공간은 결국 사용자와 환경, 두 축이 공존하는 해법이에요.” 자재 선정부터 설비 구조까지, 에너지 효율성과 환경 영향을 고려하며, 초기 설계 단계부터 건축가, 엔지니어들과의 긴밀한 협업을 중시합니다. 그녀는 말한다. “친환경 디자인은 선택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책임이에요.”

7. 일과 삶의 균형: 리듬을 잃지 않는 워킹맘의 하루
전 세계를 오가는 프로젝트 속에서도 그녀는 가족과의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나들이나 대화가 그녀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이 된다. 때로는 ‘이유 없는 휴가’를 내고 조용히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그녀만의 멘탈 회복 루틴이다. “저는 제가 흔들리면 팀도, 가정도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를 돌보는 것도 중요한 일의 일부예요.”

8. 사람 중심의 리더십, 함께 성장하는 조직 만들기

현재 그녀는 대형 프로젝트를 이끄는 팀 리더이다. 리더십에 대해 묻자, 그녀는 ‘빠른 판단력, 존중, 융통성’을 핵심 가치로 꼽았다. “팀원 개개인의 강점을 파악하고, 자율성과 책임감을 동시에 부여하는 환경이 최고의 결과를 만듭니다.” 무엇보다, 실수를 비난하지 않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실험의 결과일 수 있어요.”

9. 앞으로의 10년, 그녀가 그리고 있는 공간
미래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더 크고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이끌고 싶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거나, 제 경험을 담은 책도 써보고 싶어요.” 그녀가 꿈꾸는 미래는 단순한 성장이 아닌,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다. 사람, 경험, 철학이 공존하는 진짜 공간. 바로 그것이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설계해 나갈 공간의 진짜 이름일 것이다.

공간, 사람, 그리고 이야기
규수 리 씨와의 대화는 단순히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의 이야기를 넘어, 한 사람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녀가 설계한 공간들은 단지 벽과 바닥으로 구성된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삶의 캔버스였다. 앞으로도 그녀의 손길로 태어날 수많은 공간이 또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지, 무척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