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조화, 황은미 변호사

일반 사람들이 로펌을 접하는 일은 살면서 많지 않다. 많기는커녕 일생에서 한두 번 갈까 말까? 한 번도 안 만나야 다행인 사람이 변호사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신분을 얻거나 변경, 유지하는 일 외에는 이혼, 사고 그리고 사기 등 이런저런 송사에 휘말려야 변호사를 찾게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여기서는 스피드 티켓을 받아도 변호사를 통해 해결하기도 하니, 한국보다는 그나마 변호사와 만나는 일이 조금은 친근하다고 해야 할까? 여기, 예술가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인생의 중반쯤 전혀 다른 변호사의 삶을 살아 내고 있는, 황은미 씨를 만나 보았다. 솔직 히는, 굳이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 직업군 가운데 하나. 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인으로서 이루어 낸 성과와 그 안에 담겨 있을 고급 지식, 정보, 경험 들이 궁금함을 자아내기엔 충분한 직업. 예술가로 살아 온 지난 열정과 변호사로서 현재의 사명에 진심을 쏟아 내는 그녀의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인터뷰 글 : Mom&I 사진 : Moim스튜디오
 

갑자기 가난해졌다. 상황과 사정이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대학로로 발길을 향하게 했다. 연극이 좋았다. 사춘기 때의 방황 때문인지, 어려움에 놓여진 나의 상황 그로 인한 현실 도피적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극 무조건 좋았다. 연극영화과에 도전해 보기도 했지만, 학교를 다니는 대신 부모님 몰래 대학로의 연극판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 뒤로 연대 재활의학과에 진학해 이과생으로서 대학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자퇴를 했다. 머리는 이과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연극에의 갈망으로 가득했으므로. 02학번부터 서울예대 연극과에서는 연출 전공을 뽑았다. 지원하고, 합격했다.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해 돈을 벌고 있을 나이, 나는 다시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MFA를 받고 귀국한, 천운처럼 만난 전공 교수님. 그분의 지도 아래 미친 듯이 공부하고 실습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혹독했지만, 내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연극이어서 행복했다. 연출 파트 4명 중 결국 나 혼자만 남아 졸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기 졸업. 교수님은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대학과의 Summer Exchange Program에 나를 추천해 주었고, 졸업하던 해 여름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행에 올랐다. 나의 인생 반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여름 학기에만 참여하고 돌아오면 그만일 줄 알았던 미국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어디가 캘리포니아인지 뉴욕은 얼마나 거기서 먼 곳인지 감각도 지식도 없던 곳.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 거라고는, 계속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너무도 멀고 낯설었던 미국. 나는 여기에서 지금 변호사가 되어 있다.       

황은미 변호사의 지난 시절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며 내가 황 변호사에게 빙의하여 20대의 회상록을 잠시 써 봤다. Maggiano, Digirolamo & Lizzi P.C 로펌은 나를 비롯한 한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뉴욕과 뉴저지 지역사회에서는 사고•상해•산업재해 전문 변호 그룹으로 최고의 전문성과 함께 45년 동안 축적된 경험과 역사와 명성을 갖춘 로펌이었다. 큰 가옥 전체를 회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처음 만나 각 부서마다 데리고 다니며 직원들을 소개하고 공간을 안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꼼꼼함과 친절함,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들어설 때마다 직원들은 앉은 채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거나 일어서서 악수를 청했다. 격식에 구애 받지 않고 편하게 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회사의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마음도 이런 따뜻함이겠구나, 진실함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흐뭇했다. 

로펌의 창업인이자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인 마지아노 씨와의 잡 인터뷰를 회상하며 그녀는 말한다. “이 Fort Lee 거리를 걷다 보면 일상에서 마주치는 한인들의 숫자는 굉장히 많지요. 그런데 막상 법원에 들어서면 재판장에서 볼 수 있는 배심원 가운데 한인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어요. 마지아노 씨는 배심원석에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것은 ‘너희들의 잘못’이라고 말했어요. 한인들의 목소리가 미국 법 제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너희들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그에게 너무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이 제대로 된 법적인 권리나 이익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 로펌계의 거장이자 스승의 성토를 들으며,  한인사회가 수준 높은 법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한다. 한국인 변호사를 영입하여 소수 인종들에게 좀 더 제대로 된 이익을 지키고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든 로펌의 기업 의식이 돋보였다. 처음에는 누구나 마음 먹을 수 있다. 주류가 되면 비주류를 돕고 싶고, 권력이 생기면 약자를 돕고 싶고, 지식을 갖추게 되면 못 배운 사람을 돕고 싶고, 돈을 벌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고. 그리고 마음 먹은 만큼 어느 정도 실행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 마음과 실행력을 아주 오랫동안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오랜 시간이 쌓여 이룬 역사와 경험은 거짓말을 할 리 없기에, 소수 인종과 약자를 생각하며 40년 넘도록 기업 가치를 이끌고 있는 이 로펌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늦깎이 대학 생활을 마치고 난생 처음 LA 땅을 밟은 그 시점에서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LA에서 교환 연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해야 하는 그때 그녀는 뉴욕 브로드웨이를 보고 가고 싶다는 바람에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고, 뉴욕에 공연하러 온 한국 팀에 합류해 잠시 잠깐 활동을 하게 됐단다. 하지만 부족한 영어 탓에 소통에 위기가 오고 결국 통역자가 붙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 됐다고 한다. 운명이란 신이 정해 주는 영역이지만, 그 운명을 이루어 가는 건 인간의 몫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가 배우로 또 연출가로 연극 활동을 이어 나갔고, 연세대 100주년 기념 공연 <한여름 밤의 꿈>을 노천극장에서 성대하게 올린 그때, 미국에서 방문한 현재의 남편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한다.

2005년 미국에 와서 그와 결혼을 했다. 어떤 신념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자기 표현과 의지의 발현으로 삭발을 하고 다닐 정도로 소신 있게 살고, 드러내며 살았던 강단 있던 여자가,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한 남자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던 시간들을 상상해 보라. 

 

2008년 배우로 참여한 공연으로 UN에서 직접 초대한 작품, 당시 반기문 사무총장이 관람 후 감사패를 전달함
연출작 '길'
연출작 '시련'
2003년도 연출작 Fame 뮤지컬의 한 장면
“예술가의 삶을 한 번도 부정해 본 적이 없어요. 뉴욕에서도 저는 연극을 계속 해 갈 거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각박했지요. 저는 이방인이었고, 돈도 없었고, 언어도 부족했으니까요. 남편의 카드로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낯설었는지 아세요? 극장 문을 무조건두드렸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나는 가난한 예술가인데 이 극장의 공연을 보고 싶다고요. 내가 할수 있는 게 있으면 하겠다고요. 그래서 허드렛일도 하고, 공연 작업도 곁에서 돕고, 그러다 워크숍도 참여하고, 그렇게 일도 하고 공연도 보면서살았어요.어느 날, 콜롬비아 대학원생 공연팀을 돕고 있을때였어요. 너무 정신없이 일에 빠져 있었는데, 문득 남편 생각이 났어요. ‘밥은 먹고 있나? 굶고있지는 않나?’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어요.그를 걱정하고 있는 나를 마주한 순간, 저는 연극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돌아 보면, 단 한 번도 연극을 하며 나 아닌 타인을 걱정한 적이 없었어요. 오롯이 나의 세계에만 빠져 살았지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가 돼서 그 사람을생각하니, 이제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연극에서빠져 나와서 나만이 아닌,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었어요.”

가장 궁금했던 것, 어떻게 예술가에서 변호사가 될 생각을 한 걸까? 대답은 아주 심플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하려고 LSAT 시험을 준비했단다. 시험 공부를 하다 보니 Law School을 지원했고, 합격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했단다.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하고, 30대 후반에 전혀 다른 인생을 또 시작했으니 그녀의 삶이 여느 평범한 일상과 달리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일상에서 복작대는 소소한 감정을 그리는 일일 드라마보다는 해외 올 로케로 촬영된, 적어도 16부작 미니 시리즈 정도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갖추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 극단들이 오면 저희 집에서 묵게 해 드리죠. 가이드도 하고요. 계속 도와 주며 살았던 것 같아요. 변호사가 되고는, 이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고, 이민사회 분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가난했던 적도 있고, 타국으로 이주해서 마주치고 극복해야 했던 여러 산들을 똑같이 겪었으니까요. 그렇게 스스로의 목표가 생겼고, 1년 정도 준비를 했어요. 이제는 어느 정도 스스로 준비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있고요. 조금은 적극적으로 저를 알리고 싶어요. 이렇게 전문적인 노하우를 갖춘 법률 그룹의 서비스를 한인들이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 이력상 저작권법과 관련된 분야를 특화하는 게 유리했겠지만 생각해 보니 저작권은 일반 사람들에게 접하기 힘든 생소한 분야잖아요? 좀 더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사고나 상해 관련이더라고요.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 분야 일을 하다 보니 너무나 많은 분들이 아직도 자동차 보험을 어떤 조건으로 드는 것이 유리한지, 어떤 항목을 꼭 넣어야 하는지, 사고가 나면 어떤 수순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등 모르시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아직도 제가 변호사라는 게 낯설기도 해요. 예술과 함께하는 삶일 때도 늘 치열했지만, 같은 공력을 들여도 아웃풋이 너무 달라진 게 좀 신기하기도 하고요. 어쨌든 변호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좀 더 많아졌다는 데 감사해요.” 

예술가의 삶을 저버린 것이 슬프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망울이 이내 촉촉히 젖어 들었다. 알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렇지만 그렇게 미안해할 일도, 서운할 것도 없다. 완전히 다른 것을 택했다고 해서, 지나간 것이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무용해진 것도 아니다. 이미 그녀는 예술가로서 체화한 많은 장점들을 가진 채 법률가의 길에 뛰어 들었다. 그렇기에 니체가 예술의 두 가지 근본 범주로 규정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인 요소를 황은미 변호사는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꿈과 자유도 있지만, 의식적으로 분별하는 주관적인 능력이 있고, 이 요소들이 상충하거나 대립하지 않고, 현실을 읽고 조화로운 삶을 지속하려는 건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녀는 사람이든 일이든, 분석하고 읽을 수 있는 힘이 많아 보였다. 이런 그녀를 찾아 온 클라이언트라면 운이 좋은 게 분명하다. 

 

 

황은미 변호사

2005년 도미 후 시러큐스 대학의 로스쿨을 마치고 현재 Maggiano, Digirolamo & Lizzi P.C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hwang@maggianolaw.com카카오톡 플러스친구 MDL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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