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엮은 유산: 동시대 텍스타일 아트의 재정의

공예를 넘어 개념으로, 실과 바늘이 짜는 21세기 미술의 새로운 서사

글_더 앰 매거진 편집부

텍스타일 아트는 오랜 시간 동안 미술사에서 주변부에 위치해 왔다. 실용성과 가사노동, 여성의 전통적 역할과 연결된 직물 작업은 ‘공예’로 분류되며, 순수미술의 중심 무대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러한 위계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이제 텍스타일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정체성, 기억, 페미니즘, 생태, 식민주의 비판 등 복합적인 문화 담론의 핵심 매체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의 텍스타일 아트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손끝의 노동으로 정치를 직조하고, 부드러움으로 급진성을 품으며, 유산과 저항의 이야기를 얹어낸다. 전 세계 작가들은 실과 천을 통해 새로운 미술사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기억과 정체성의 직조: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

텍스타일은 느리고 물리적이며, 감각적 경험을 전제로 한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은 자수와 아플리케 기법으로 자전적 경험을 풀어낸다. 대표작인 텐트 설치 <내가 잠자리를 같이한 모든 사람들 1963–1995>는 천이라는 친밀한 매체를 통해 고백과 기록의 미학을 성립시킨다.

빌리 장게와(Billie Zangewa)는 실크 콜라주를 통해 흑인 여성의 일상성과 주체성을 조명한다. 그녀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개인적 친밀함을 통해 정치성을 발현하며,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실로 가시화한다. 직조된 장면 하나하나가 돌봄과 지속의 서사로 이어진다.

페미니즘 유산의 계승과 진화

1970년대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텍스타일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주디 시카고, 미리엄 샤피로, 페이스 링골드 등은 ‘여성의 일’로 간주되던 매체를 정치적 도구로 전환시키며 가부장적 미술계에 도전했다. 링골드의 <타르 비치>는 퀼트와 이야기, 회화가 결합된 형식으로 흑인 여성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찰했다.

이 유산은 오늘날 차발랄라 셀프(Tschabalala Self)의 혼합 텍스타일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재활용 천, 자수, 오브제를 활용해 흑인의 신체와 욕망에 대한 시선을 전복하며, 회화와 퀼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강렬한 시각 언어를 구축한다.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섬유의 윤리

텍스타일 아트의 느리고 반복적인 특성은 속도와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과 충돌하며, 그 자체로 저항이 된다. 디드릭 브랙큰스(Diedrick Brackens)는 목화를 재료로 미국 남부의 흑인과 퀴어 정체성을 직조하며,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응한다.

익샨 아담스(Igshaan Adams)는 전통 이슬람 직조 방식과 전선, 밧줄, 구슬을 결합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공 사회의 계급, 인종, 종교 문제를 시각화한다. 그의 태피스트리는 복잡하고 반짝이며, 영성과 저항의 미묘한 층위를 품는다.

타마라 코스티아노브스키(Tamara Kostianovsky)는 버려진 옷감과 가구 덮개를 사용해 도축된 육체의 형상을 재현함으로써, 소비주의와 생태적 폭력을 비판하며 폐기된 것의 가치를 복원한다.

세계적 전통을 잇는 동시대의 실험

거의 모든 문화는 고유한 직물 전통을 지니고 있다. 현대 텍스타일 아티스트들은 이를 계승하는 동시에, 이주와 혼종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한다. 소피아 나렛(Sophia Narrett)은 자수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감정과 여성 욕망을 탐색하고, 키아키오 & 지아노네(Chiachio & Giannone)는 LGBTQ+ 커뮤니티를 위한 집단 자수 프로젝트로 텍스타일의 참여적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조각과 설치로 진화한 텍스타일

막달레나 아바카노비치(Magdalena Abakanowicz)는 텍스타일을 3차원 조각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거대한 섬유 조형물인 ‘아바칸’을 통해 평면성과 순응성을 거부했다. 에르네스투 네투(Ernesto Neto)는 코바늘로 구현된 몰입형 설치 작업을 통해 공간과 신체, 감각의 연결을 실현한다.

해나 엡스타인(Hannah Epstein)은 러그 후킹을 통해 인터넷 문화와 민속을 결합한 하위문화적 서사를 직조하고, 소니아 고메즈(Sonia Gomes)는 브라질 전통과 현대 조각을 섬유 매체로 통합한다. 이들은 텍스타일을 조각, 건축, 환경적 경험으로 재구성하며, 실의 예술을 확장된 조형 언어로 밀어올린다.

결론: 실로 다시 엮는 예술의 중심

텍스타일 아트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이는 공예와 예술, 주변과 중심,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해체하며 예술의 정의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주도하는 시대 속에서 섬유 예술은 느림과 촉각성, 공동체성과 지속성의 가치를 회복시킨다.

현대 텍스타일 아티스트들은 단지 직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실을 통해 노동, 정체성, 기억, 권력의 구조를 해체하고 다시 엮는다. 이들은 실을 통해 미래를 짜고 있으며, 오늘의 미술사를 실로 다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