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최초’ 역사를 써 내려가는 파나소닉 CEO 이명원

 

지난 1월 초에 열린 세계 최대 IT전시회 CES에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상당수 기업들이 오프라인 참여 규모를 축소 또는 취소하고 온라인 참여로 전환했다. 미래의 일상을 바꿀 신제품, 신기술을 소개하는 각 기업들의 영상들이 각축을 벌이며 공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한 여성 CEO가 있었다. 세련된 숏커트에 단단한 카리스마와 따뜻한 웃음을 동시에 지닌 그녀는 지난해 10월 한국인 여성 최초로 파나소닉 북미 지부의 최고 수장으로 임명된 이명원 CEO & Chairwoman이다. 파나소닉에서 CEO로 여성이 임명된 것도, 한인이 임명된 것도 처음이다. 그야말로 최초의 최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파나소닉 이명원 CEO를 맘앤아이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파나소닉 북미 본부 최고 경영자로 2021년 10월 취임하셨는데요. 지난 3개월 어떠셨나요?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처음 회사로부터 CEO 제안을 받은게 지난 여름이었어요. 저는 1987년 입사해  2004년에 파나소닉 북미 지부 인사 담당으로 부사장이 됐고, 2015년에는 인사팀 및 기획실의 공동 책임자로 부사장직을 맡았었어요. 예전에도 석세션 플래닝(Succession Planning – CEO 승계 프로그램 :후임자를 사전에 선정하고 필요한 자질을 육성시키는 기업의 체계적 활동)에 이름이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제가 CEO직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 터진 미국 내 인종 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이슈가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왜 스스로 CEO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까에 대해서요. 그래서 지난 5월쯤 회사에서 10월 1일자로 취임할 새로운 회장직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2004년 부사장이 된 이후 지금까지 4명의 CEO를 상사로 모시고 일해왔기 때문에 CEO 업무와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있어보니 쉽지는 않네요(웃음). 자리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운 것 같긴 합니다.

1년 전쯤 한인 여성들 대상 강연에서 본인의 향후 계획으로 소프트 랜딩을 언급하셨는데 오히려 큰 도약을 하셨어요. 1년 전만해도 정말로 승진?에 관심이 없다 생각했어요. 생계형 커리어라고 하나요?(웃음) 애가 둘이라 대학 학비를 벌겠단 일념으로 굉장히 열심히 일했는데 아이들이 졸업하고 직장도 잡으면서 제 수입이 많이 필요치 않게되어서 소프트랜딩을 많이 고려했어요. 제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코칭을 공부했기에 리더십 코치를 할까 생각도 했고, 한국에서는 이화 여대 미대를 졸업했기에 일선에서 물러나 그림을 그릴까 생각하면서 구체적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1년도 채 안되어 인생의 전개가 완전히 달라졌네요. 앞서 언급했듯이 코로나로 인종 차별과 다양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인사 책임자로 오래 일해왔기 때문에 회사나 개인 차원에서 오랜 고민 끝에 지금 은퇴를 준비하는 것 보다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1년 만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지금은 일에 대한 욕심이나 야망보다는 새롭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요.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 지금의 저한테는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파나소닉의 창업주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손꼽히는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인데요. 파나소닉의 기업 문화는 어떤가요?
제가 1987년에 입사를 했어요. 한국인 여성으로 일본 기업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건 창업주의 경영 이념이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파나소닉을 소개할 때 ‘제품을 만들기 이전에 사람을 만든다’라 했습니다. 즉, 사람이 제대로 되어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온다는 거죠. 파나소닉이 미주에 들어온지도 60년 쯤 되었는데요. 우리는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과 오래 갈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하며 수익보다 사람에 포커싱을 맞추어왔습니다. 또한 수익만큼 사회 공헌을 강조하며 공존 경영과 사회에 이익이 되는 기업 문화를 추구해 오고 있습니다.

파나소닉이 펼치고 있는 사회 기여 활동이 궁금한데요.
파나소닉은 사회적 책임을 위한 비영리 재단 파나소닉 파운데이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재단의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요. 올해 1월부터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STEM FORWARD’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수영 선수 케이티 레데키와 디스커버리 에듀케이션이 함께하는 STEM FORWARD는 k-12, 특히 중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STEM(과학, 기술, 엔지니어링, 수학)분야 교육 프로그램인데요. 1990년대 이후 사회 전체 일자리는 34%가 늘었지만, STEM분야의 일자리는 79%가 증가했습니다. STEM분야의 일자리는 다른 일자리보다 소득이 3분의 2가 더 높다고 합니다. STEM분야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또한 좋은 일자리지만, 여전히 충분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STEM FORWARD’는 이 분야에서 균등한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프로그램(DiscoveryEducation.com/STEMForward)입니다.

인사담당자로 오래 커리어를 쌓아 오셨는데요. 본인은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사과에 오래 있었다 보니 리더십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저는 협동하는 리더십 그리고 코칭(Coaching) 즉, 코치로서의 리더라는 결과를 받았는데요. 요즘은 재능있는 분들이 많고 아이디어가 중요한 시대잖아요. 그래서 권위적이고 근엄한 리더십보다 코칭이나 콜라보레이션 할 수 있는 리더십도 더 좋다고 생각하고, 제 스스로의 강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토라고 할까요? 자주 생각하는 말이 있으세요?
“Life is trade-off” 위기는 기회라는 말과 상통하는 게 있는데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또 나쁜 일이 있으면 거기서 배우는게 많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위기나 나쁜 일이 생길 때 이를 열심히 잘 극복해내면 마음의 근력이 생기고 내 힘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근하실때의 마음 가짐은?
회사에서는 절대로 찌푸린 얼굴을 안해요. 제가 인사 책임자가 된 다음부터 조직 개편이라던지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도 많이 샀죠. 그런데 책임자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인상을 쓰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저는 회사에선 누구를 만나도 웃고, 화내지 않고, 찌푸리지 않으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일할 땐 일 자체가 힘들잖아요. 어차피 힘든 일, 될 수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웃는 얼굴로 하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젊은층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나요?
자녀가 두 명 있는데, 둘 다 장성해서 이젠 더 많이 대화를 해요. 첫째 아들은 87년생, 둘째 딸은 92년생인데요. 아들은 실리콘 밸리의 한국계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딸도 스타트업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친구 같은 엄마가 되려 해요. 서로 회사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신랄한 비판을 해줘 도움을 많이 얻습니다. 회사 차원에서는 Reverse Coaching을 했었어요. 젊은 사원이 저를 코칭해 주는 건데요. 무척 정직하게 조언을 해주기도 해서 가끔은 마음이 아파요(웃음). 그런데 너무 고맙죠. 그런 기회가 없으면 점점 더 꼰대(?)가 되기 쉽잖아요.

첫째 아들을 낳고 회사에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킹 맘으로 힘들고 고민이 있었던 순간이 있다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갑자기 열나고 아프잖아요. 데이케어에서 전화와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하면 회사 일은 많은데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고 그럴 땐 정말 힘들었죠. 두어번은 아이를 회사에 데리고와 제 상사가 봐줘서 일을 한 적도 있어요. 회사에서 호의적으로 이해를 해줘 견딘 것도 있고요. 애들한테는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힘들었죠.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는데 스스로 위로를 삼는 말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아이들이 꼭 엄마랑 마주보고 크는 것보다 엄마의 등을 보고 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에요. 열심히 일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엄마의 등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선물은 엄마의 행복’ 이라는 것인데요. 한국 엄마들은 희생을 당연시 하잖아요. 그런데 희생하는 엄마보다는 건강하고 행복한 엄마가 더 중요하다 믿어요.

자녀들은 엄마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요? 어떤 엄마인 것 같으세요?
아들한테 물어봤더니, 엄마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데 가끔 화를 내면 왜이러나 싶을 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적인 부분을 보여준 것 같아서 그게 또 미안하네요. 딸하고는 정말 친구같이 지내려고 해요. 어떤 때는 딸이 더 어른스러운 때가 있어요. 딸이 저를 배려하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곤 하거든요. 정신 연령은 우리 딸이 저보다 더 높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자녀들이 일하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나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었나요?
제가 일본 근무를 두 번 했거든요. 처음 갔을 때가 2001년인데 큰 애가 14살, 작은 애가 9살이었어요. 당시 애들 둘을 데리고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은 국제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딸 아이가 하루는 “엄마 내가 내일 쇼앤텔(Show and tell)을 하는데 학교에서 엄마 꼭 오라고 했어”라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무척 중요한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이 있었어요. 사실 이 대화를 하기 직전에 한참 가정과 일의 균형 잡는게 너무 힘들어 스스로 결심한 게 있었는데, 일과 아이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를 우선시 하겠다는 결심을 했거든요. 결심을 한지 두달만에 이런 갈등의 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너무 고민이 되서, “엄마 잠깐만 나갔다 올께”하고 동네 바에 갔어요. 술을 잘 못하는데 마티니를 한 잔 마셨어요. 마티니가 뭔지도 잘 몰랐던 때에요. 한 잔을 마셨는데 결정이 안나서 또 한 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셨어요. ‘그래도 일 때문에 일본에 왔는데 내일은 안 나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집에 가서 “내일은 엄마가 학교에 못갈 거 같아”라고 했더니 아이가 울었어요. 다음 날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퇴근을 했죠. 그날 밤 집에 가서 딸에게 “어떻게 됐어?”하고 물었더니 딸이 “뭐가?”라고 대답하더라구요. 그래서 “Show and Tell 말이야” 했더니 “응, 다른 엄마들도 안왔어”라고 하더라구요 (웃음). 그래서 결론적으론 괜찮았지만 그래도 그 때가 굉장히 힘들었고 그 기억은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아요.

이명원 CEO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엄마는 호랑이 같았어요. 무척 강하시고 우리가 칭얼대도 절대 받아주지 않으셨죠. ‘우리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모든 걸 감싸주는 엄마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엄마의 그런 강인함이 저를 만들었겠죠? 제가 파나소닉에 입사한 것도 엄마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첫 아이 출산 후 2~3주 됐을때 파나소닉에서 잡 오퍼를 받았는데요. 제가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되서 처음에는 거절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한번 가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파나소닉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제일 은행에서 오래 근무하셨어요. 서울에 있던 가족과 잠깐 떨어져 부산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으셨어요. 그 때 혼자 일어 공부를 하신 계기로 오사카에 주재원으로 나가셨어요. 그 때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3년 동안 가족이 일본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덕에 저희 세 자매는 다 일어를 배웠구요. 그리고 아버지가 1987년 LA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아 모두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글을 참 잘 쓰시고 필체도 좋으세요. 제가 일본에서 근무할 때 아빠한테 편지를 받고 펑펑 운 기억이 있네요. 많이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편지는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님이 지난 해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둘째 딸이 파나소닉 최초의 여성 CEO가 된 걸 너무 자랑스러워하셨을 것 같아요.
지난해 초 기회가 오면 CEO직을 해보려는 마음을 갖고 “내가 올해는 좀 더 일을 열심히 해 보려 해. 엄마가 기도해 줘”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엄마가 당시 몸이 안 좋으셔서 말을 많이 안하셨는데, 크게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며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워주셨어요. 그게 1년 전이네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신 미대 언니 이명원CEO님의 그림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참 인생이 재미있어요. 대학 다닐 때는 교수 부인이 되서 집에서 그림 그리는 현모양처가 꿈이었어요. 그런데 미대를 다니며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그림을 다시 시작했어요. 유화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서 안그렸는데 2020년 4월부터 유화를 시작해서 열심히 그리고 있어요. 그림 그리는 시간이 너무 좋고 무척 힐링이 돼요. 주로 풍경화와 꽃을 많이 그립니다. 제가 파나소닉 에서 CEO를 4명 모셨는데 그 중 세 분과 아직 교류를 해요. 제 첫 보스가 그러더라구요. “너는 일 그만두고 그림이나 그리지 그러니?”라고요(웃음).

첫 보스는 어떤 분이셨나요?
그 분이 제일 절 고생시켰어요. 근데 저의 의사 결정 방식이나 힘든 일을 대할 때 태도는 첫 보스인 요시 야마다로부터 많이 배운 것 같아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요시 야마다를 자신의 멘토라고 해요. 그 때문에 파나소닉이 테슬라와 파트너십을 시작했어요. 창업주가 말씀하셨던  “사업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이명원 CEO님의 라이프 라인에서 지금을 어떻게 기록하시겠어요?
피크(Peak)죠. 피크가 높으면 밸리(Valley)도 깊잖아요.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고 힘든 일도 많은데 ‘이게 나를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고 매일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2022년 새해를 맞아 본인의 키워드를 꼽아본다면?
‘self-care’ 즉, 심신의 건강을 꼽고 싶어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는 셀프 케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또 하나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과 얘기하다 보면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똑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아는 것이 많아요. 그렇다보니 비판적인 시각도 생기게 되는데요. 그것 때문에 부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되서는 안될 것 같아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다는 건 결과가 아니라 선택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저의 새해 키워드로 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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