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도시락은 아쉬운 게 많았던 어린 시절,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힘들지 않게 지나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김지연 세프는 유난히 도시락 싸는 게 좋았다. 결혼해 주부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평소 만들어 먹는 음식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주변인들이 보고서 아이 도시락, 가족 모임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청해 왔다. 요리하는 일을 비즈니스로 생각해 본 적 없기에 망설였다. 그런데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 소풍 가는날, 죄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결심이 섰다. 장사나 사업이란 게 만만하지 않으리란 각오도 챙겼다. 그래서 음식 만들 재료와 도구들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재우고 밤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형 시장이 그나마 집에서 가까워 고마울 따름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잠든 밤에는 행여 깰까 발꿈치를 들고 도시락을 쌌다 .
도시락은 이내 맛있다고 입소문을 탔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했기에 9평 작은 카페에서 휴대버너를 놓고 요리하다 주문이 폭주하면서 용기를 냈다. 압구정동에 ‘파티드라마’ 매장을 오픈했다. 방송으로도 소개되었고 파티드라마의 수제 도시락 창업 강좌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국외에서 수강생들이 물밀듯이 찾아왔다. ‘요리’를 다루는 만큼,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대형 강좌는 내키지 않아 인원 수를 제한했다. 그러자 수강생들은 몇 달 앞서 수업료를 내기까지 하며 기다려 주었다. 뿌듯한 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은 커졌다.
그와 함께,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서 생각지 않게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다. 600여명의 웨딩 캐더링을 진행하다가 결정적인 깨달음을 만났다. 30년 경력을 앞세운 외부 뷔페팀을 고용해 한식을 맡겼다. 오랜 경력에 걸맞는 고액의 보수를 지불했지만 배울 점이 없었다. 600명이 먹을 음식이라도 단 한 명을 위한 음식처럼, 맛있고 보기 좋게 만들 수는 없을까? 머릿속에 넘쳐나는 질문은 더 많아졌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스승’이 없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해 ‘CIA’를 선택할 때 망설임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란 명성도 있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딸에게 뉴욕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동안 쌓은 명성과 성공을 미련 없이 뒤로하고 2017년,공부를 시작하기엔 ‘적지 않다’하는 37세 나이에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