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잘레스씨와 애뜨라스씨가 전하는 메시지
인터뷰/글 황은미 변호사
아주 어린 시절, 내가 반찬 투정하거나 밥을 남길 때면, 할머니께서는 어김없이 한국 전쟁 피난 시절과 그 이후 전쟁으로 인한 배고픔에 대한 일장 연설을 펼치셨다. 전쟁 때는 없어서 못 먹던 귀한 음식들을 남긴다며 어린아이의 투정을 조금도 받아주지 않으시던 할머니.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자식들을 등에 업고 피난 다녀야 했던 어미의 힘듦과 끔찍한 배고픔이 바로 어제 일처럼 묻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 전쟁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2023년 6월 24일, 뉴저지 포트리 소방서 건물에서 열린 한국 전쟁(6.25 전쟁) 제73주년 기념식에는 참전 용사들이 현장에 있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온몸으로 겪은 곤잘레스 씨(Albert Gonzalez)와 애뜨라스 씨(Alexander W. Atheras). 이들은 뉴저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며 한국 전쟁을 함께 겪어낸 동지이며, Korean-American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민간인으로, 어린 자식들의 부모로, 힘겹게 겪어내야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픔으로 배웠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인들, Korean-American들은 곤잘레스 씨와 애뜨라스 씨와 같은 참전 용사들을 통해 세계사적 흐름 속에 놓인 그때의 한국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맘앤아이는 곤잘레스 씨와 애뜨라스 씨를 스튜디오에 모셨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낸 한국과 한국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한인들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나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
Albert Gonzalez: 저는 포트 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1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해병대로 복무하면서 중사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 해병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명판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2월에 19세였던 저는 미국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해병대 훈련소에서 30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캘리포니아주 팬들튼 주둔지로 파견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한국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훈련을 받은 후 일본 고베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군 부대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는 각자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저는 강화도 근처에 주둔한 해상 전차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도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약 1년간 머물���습니다. 우리는 중국군이나 북한군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몇 주마다 주둔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자주 이곳저곳을 옮겼습니다. 머무른 지역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고 우호적이었습니다. 병사들의 옷을 세탁해주는 여성들이나 신체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도와주는 남성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들은 탄약을 운반하는 ��� 육체 노동이 필요한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군인이었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우리가 가진 초콜릿, 담배, 커피와 같은 물품을 나눠주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Alexander W. Atheras: 저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육군 398포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주둔했으며 나중에 오산으로 이동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저는 텍사스의 포트 블리스에서 포병 훈련을 받았으며, 이 기간 동안 카드리로 승진하여 약 한 달 동안 해안포 주둔지에서 중사처럼 소대를 지휘했습니다. 그 후 동해안으로 항해하면서 전쟁선박에 탑승하고 새벽 2시쯤 뉴욕 항구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매우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이동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에 들러 병력을 태우고, 세계를 뒤로한 후 콜롬비아를 거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일본을 지나 한국으로 ���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특정 장소를 모르고 내리게 되었습니다. 트럭을 타고 오후 3시쯤 기차를 탔습니다. 그러나 기차는 밤중까지 오랜 시간 멈춰 있었고, 대장은 기차에서 내리려는 사람을 쏴버릴 것이라는 엄격한 경고를 내놓았습니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무장한 경비병들이 보여서 동료들과 혼란스러웠지만, 여러 번의 변곡점을 거치며 결국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여 텐트와 모닥불을 설치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약간의 긴장과 사고가 있었지만, 주로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몇 주 뒤 신호병이 우리 기차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줄 때, 당시 한국의 상황과 잠재적 위험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전쟁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요리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는 것은 당시 우리가 받았던 식량이 1947년부터 얼려놓은 제2차 세계대전의 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웃음). 소고기 미트 상자도 있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처음 듣게 된 ‘KOREA’
Albert Gonzalez: 저는 고등학생 시절 신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국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대부분의 친구들과 저도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지리적으로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Alexander W. Atheras: 당시에는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곤잘레스씨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 저 포함,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들��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몇 년 전에 남성 잡지 “아르고시”에서 본 기사 제목 “한국의 사자 남자들”을 기억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가장 혹독한 겨울로 기록된 1951년 한국의 겨울에 관한 기억들
Albert Gonzalez: 1951년 한국에서 겪은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결국 저는 동상에 걸리고 말았으니까요. 문제는 제가 동상에 걸렸을 때 부대에 자진해 알리고 치료받을 수 없었어요.
해병대에서 혹한기에 쓰는 모자가 있었는데, 저는 어떤 이유로 그 모자를 쓸 수 없어서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쓰지 않았어요. 그 모자를 쓰지 않고 추위에 불과 몇 분 노출된 것으로 심한 동상에 걸렸습니다. 의무병은 제 동상을 치료해 주었지만,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 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명령을 어기고 모자를 쓰지 않아 동상에 걸렸다는 사실을 보고하면 해병대의 규정 위반을 밝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승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매년 겨울이 오면 그때 동상에 걸린 부위의 피부가 벗겨집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동상의 흔적은 1951년 서울의 혹독한 겨울을 끊임없이 상기 시켜주는 어떤 상징이 되었습니다.
Alexander W. Atheras: 한국 전쟁 때를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다치거나 죽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지요. 제가 겪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기억납니다. 순찰 중이던 제 머리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가는 뚜렷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격수가 논가를 지나는 우리를 조준해서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총알이 논의 여기저기로 쏟아지면서 논을 채우고 있던 물구덩이의 물이 총성과 함께 마구잡이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저는 저격수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고, 우리가 직면한 위험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동료가 제 눈앞에서 목에 총을 맞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전쟁의 잔인함을 개인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그 고통의 흔적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지요. 이러한 경험들로 점철된 이제 갓 스무 살의 저는 동료 병사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저의 철없었던 10대 시절과 전쟁의 가혹한 현실은 극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기억 속의 한국 전쟁은 생사가 오가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 전쟁 참전 후 다시 돌아온 미국
Albert Gonzalez: 한국에서 돌아온 후 떠나기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3년 동안 회사에서 제 직위를 유지해 주었습니다. 그 기간 동료들이 받는 모든 승급을 받았고, 같은 직책에 재고용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귀환한 후에도 몇몇 동료 병사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네 명의 전우가 친하게 지냈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친구가 지난 1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Alexander W. Atheras: 미국으로 귀환 후 건설 회사 감독으로 일하던 이웃의 도움으로 취업했습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건설 분야에 참여하고 시추 작업과 다이너마이트 사용 면허증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약 1년 후 미술에 더 큰 열정을 느껴 미술 학교로 진학하여 종이 조형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로드 앤 테일러의 디스플레이 부서에서 일하면서 디스플레이 디렉터로 승진하고 Zaria와 Strowild 등의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미네소타의 한 기업에서는 20개 매장을 총괄하는 기업 이사로 승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저의 한국전 참전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미래를 위한 역사 교육의 중요성
Albert Gonzalez: 한국 전쟁 참전 용사로서, 저는 아이들에게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물론, 아이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지만, 사회, 문화, 국제 관계 등에 관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관점과 능력 향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곡된 관점과 편협한 인식은 아이들이 잘못된 리더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며, 잘 짜인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교육을 통해 성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Alexander W. Atheras: 곤잘레스 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국 전쟁을 직접 겪은 우리와 같은 세대들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포트리 고등학교와 레오니아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통해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천편일률적인 관점이 아닌 우리의 경험을 통해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 관해 듣고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학생들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열린 대화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한국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Alexander W. Atheras: 제가 사는 지역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놀라운 성장과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한 한국의 발전 상황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 중 하나로 발전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의 독창성과 정신적 역량은 이러한 발전의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즈니스와 국가 성장은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교육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이 국가의 기초가 되며, 이는 미국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교육이 없다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교육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힘과 열정은 세계가 인정하는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의 성과에 감사하며, 향후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Albert Gonzalez: 미국을 돌아온 후 저는 한국 정부의 후원으로 일곱 차례나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한국의 놀라운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는데, 특히 1952년 폐허로 가득 찼던 서울이 격렬한 전투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던 도시에서 어떻게 현대적이고 발전된 대도시로 거듭났는지 보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지하철 시스템, 교통 체계, 현대식 건축물 등 모든 것이 전시 후 도시 복원이 아니라 눈부신 발전의 증거로 빛났습니다. 한국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강한 의지와 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을 통해 미국과 한국이 공유한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문화 교류와 상호 적응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상호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포트리에 많은 한인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겪고 느끼고 목격한 한국의 발전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놀라운 정신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가치를 나누며 더욱 화합된 미국과 한국, 그리고 더 나아가 성숙한 한인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19살로 돌아간다면…
Albert Gonzalez: 19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해병대에 입대하기로 한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해병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패리스 아일랜드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제가 2급 평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2급 평발은 군 복무에 결격 사유가 됨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안을 고집했고, 결국 전차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전차 부대의 훈련은 강도가 무척 높았고 전시 상황에서 생존 확률은 낮았습니다. 분명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며,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19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1951년 서울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맞섰을 것입니다.
Alexander W. Atheras: 19살의 내가 한국 전쟁에 참전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제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혼이었고 부양가족으로 어머니와 형제들만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한 가지 내가 다시 19살로 돌아간다면 장교들과의 관계를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해 보고 싶습니다. 19살의 저는 장교들의 입장을 고려 못 하고 제 입장만 고수하며 문제를 왕왕 일으키곤 했으니까요(웃음). 하지만, 전반적으로 제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내린 한국 전쟁 참전에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19살로 돌아간다면…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웃음).
한국 전쟁은 공식적으로 ‘전쟁’으로 선포된 적이 없다. 트루먼 대통령이 공식 선전 포고 없이 이를 ‘경찰 행동’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1953년 7월 휴전을 상징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공식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은 오늘날까지도 기술적으로 분쟁 지역에 속한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공식적인 평화 조약도 없기에 한국 전쟁은 때론 ‘잊힌 전쟁’이라 불리지만, 곤잘레스 씨와 애뜨라스 씨와 같은 참전 용사의 희생은 결코 잊.혀.져.선 안될 것이다.미국 재향 군인회(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에서의 전투 사망자는 22,700명으로 추산되며, 총사망자는 54,200명에 이른다. 2020년 기준으로 백만명이 넘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28,223명의 한국전 참전 용사가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참전 용사는 우리 한인의 이웃이자 우리의 역사다. 그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다음 세대와 공유하여, 한국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희생과 노고에 대한 최선의 감사 표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