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성 Daddy의 자녀 교육 노트
글 Michael Hwang 황지훈

“약관의 나이에 입신양명”이란 표현을 오래전 학교 수업에서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제 아들은 본인 또래보다 거의 한 살이 어린 나이로 학교를 다니며, 어려서부터 희망했던 프린스턴 대학에 합격하여 항공우주 기계 공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3학년인 스무 살에는 꿈의 직장 NASA에 Pathway Guaranteed Internship에 합격했는데요. 아들의 지나온 과정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 글로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대학 2학년 때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미국 가면 어떻게 되겠지”란 생각으로 왔기에, 오자마자 급한 대로 편입에 필요한 토플을 준비하였고, 이때 등록했던 교포 운영 학원에서 파트 타임 일자리까지 잡아 학원가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근무하다 2002년에 프리랜서로 전향했습니다. 학생 방문 수업과 상담을 주로 하며 한국 유학생들의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 일을 해왔습니다. 이때 본격적인 명문고, 명문대 아이디어가 쌓였다고 생각됩니다. 미국 명문대 진학 시 동양계 남학생은 소수 민족이 아닙니다. 코비드 상황이 회복되면 그간 주춤했던 외국 유학생까지 다시 몰려들어 더 어려워질 거라 예상합니다.
평범한 중산층 교포 가정에서 거액의 과외/운동과 아트/리서치/인턴십 등을 전부 서포트하기엔 금전적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경제적 부담으로 자식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보낼 수 없는 부모님들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아울러 여유는 있는데 어떤 활동을, 어디에서, 언제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지원에 유리한지 모른 채 자녀가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 서포트하기엔 이미 늦은 경우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다행히 제가 교육 쪽 일을 해서 제 아들의 마스터플랜은 주변 도움 없이 해결되었고, 더불어 아들이 타고난 성향으로 묵묵히 혼자 학교 성적 관리 등을 해와서 아들은 비교적 순탄한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선 아들의 가치관과 관심사 형성에 가장 밑바탕이 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아빠의 직업이 학생 교육 관련이라 교육에 대한 저항감이 적었습니다.
2. 엄마의 지도 아래 게임 및 불필요한 컴퓨터 사용은 일요일 밤~목요일 밤에는 통제되었고, 컴퓨터는 공부 공간으로 바꾼 거실에서만 했습니다. 또한 매일 취침 전에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이 길러졌습니다.
3. 아들의 성향이 이공계에 가까운 것이 확인된 후에는 가급적 관련 내용들이 나오는 잡지와 인터넷, 유튜브 다큐 등을 같이 접했습니다.
4. 안목을 넓혀 주는 의미의 여행을 편하지 않은 스파르타식으로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는 선에서 다녔습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 후, 본격적으로 어떤 방향성의 방과 후 활동을 해줘야 할지 고심했습니다. 우선 아들의 성향 파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경험과 여행을 통해 아들의 관심사를 찾는 색다른 시도를 하였습니다. DC에 가서는 국회 의사당을 예약해 견학했습니다. 덜레스 공항의 스미스소니언에서 Space Shuttle Enterprise와 Blackbird를 보여줬습니다. 디즈니월드에서는 일정을 비워 Kennedy Space Center를 방문했습니다. 대학 동기가 노르웨이 대한항공에 발령 난 걸 핑계로 친구 집에 민폐를 끼치며 피오르와 빙하, 그리고 스톡홀름의 노벨 센터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아인슈타인과 고 김대중 대통령의 전시품을 함께 보았습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10시간 걸리는 심야버스로 스위스 제네바까지 넘어갔습니다. 스위스 국경에서 마약 사범이 군인에게 쫓기는 걸 라이브로 봤습니다. 아이슬란드에 가서는 현재 진행형으로 녹고 있는 빙하를 보여줬습니다. 멕시코에 가서는 로컬 애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 뉴저지에서 자라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줬습니다. 모든 여행은 철저하게 배낭여행식으로 숙소만 정한 뒤, 렌터카와 저가 항공사를 애용한 덕에 적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대신 어느 여행이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뭘 둘러볼지를 애들이 찾게끔 숙제를 줬습니다. 예기치 않게 노르웨이에서 눈보라로 터널에 갇혔던 것, 멕시코에서 미국 면허증으로 차를 빌려 Hotel California를 찾아간 것, 아이슬란드에서 차량 입장 금지 팻말의 Glacier Lagoon을 시속 3km로 들어가 현재 진행형으로 녹고 있는 빙하를 직접 본 것, 스위스 국경에서 셰퍼드가 모든 승객을 냄새 맡았던 것들도 훗날 아들과 좋은 추억으로 얘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유난히 필드 트립 등에서 주머니에 여러 모양의 돌을 넣어오는 아들을 보며 농담으로 “Rock에서 Rocket으로 조금 바꾸면 어떠냐?”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게 계기였는지 아니면 KSC Launch Pad 39A를 보면서 “WOW” 했던 게 계기였는지, 어느 시점에 아들의 관심사가 이공, 정확히는 항공 우주 기계 공학(Aerospace Mechanical Engineering)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민은 어떤 경로(path)가 바람직할지를 정하는 거였습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상위권이어야 하지만, 소위 탑 명문대가 요구하는 합격생 조건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7학년 어느 날 넌지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중학교 친구들이랑 떨어져 다른 고등학교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하니?” 의외의 답이 아들로부터 돌아왔습니다. “새 학교에 가면 새 친구도 생기고, 동네 친구는 계속 만날 수 있어 괜찮아.” 그때부터 8학년 지원의 과학고를 생각하였고, 우리 거주지인 모리스 카운티의 Academy of Math, Science, and Engineering에 지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길러진 책 읽는 습관 덕에 어휘력은 문제없었고, 수학은 본인이 좋아하며, 학교 성적은 우수했기에 구(district)마다 1명씩 선발하는 과학고에 무난히 합격하였고, 이후 11명의 중국계와 12명의 인도계 학생들 틈에 섞여 4년간의 나름의 선의의 경쟁을 거쳐 아들은 프린스턴에 합격했습니다. 아이비리그 중 유일하게 해당 전공이 있는 게 프린스턴이어서 하버드는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코비드 때문에 아들은 온라인 수업으로 1학년을 시작하고, 2학기부터 기숙사에 들어가 대학 생활도 본인 목표에 맞춰 나갔습니다. Princeton Ricketier Club에 들어가 Level 1 자격증을 땄습니다. 1학년 마치고 여름에 Bio-Physical Engineering 교수 밑에서 Internship을 7주가량 했습니다. 2학년 때 NASA 인턴십을 마치고 온 선배를 만나 방향성이 더 구체화되었고, 수강 과목도 이에 맞추어 가장 중요한 Thermo Dynamics를 듣게 됩니다. 2학년 가을 학기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이동 중 우연히 2021년도 노벨상 수상 프린스턴 교수들 리셉션에 들러 물리학상 수상자 Professor Manabe, 화학 상 수상자 Professor Miller 및 네 분의 수상 교수들을 만나 담소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경험으로 생각됩니다. 2학년을 마친 여름에는, 기계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서열이 상당히 높은 Howard Stone 교수 밑에서 7주의 인턴십을 경험했습니다. NASA Pathway 지원 시 인턴십 교수들의 추천장이 큰 도움이 됐을 걸로 짐작합니다.
지난 11월의 NASA Pathway는 비공식 데이터로 만 명 지원에 백 명 정도가 합격자로 나옵니다. 경쟁률이 높은 것보다 NASA의 선발 기준이 10~20년 후 미래의 전략적 방향성에 합당한 학생들을 미리 선발해 훈련하는 것이라서, 아들 스펙이 좋아서라기보다 NASA의 방향성에 저희 아들이 적합했다 여겨집니다. 1월 중순 플로리다 KSC에서 16주 Training을 시작으로 인턴십이 시작됩니다. NASA, Space X, 그리고 Blue Origin 미션의 Safety and Mission Assurance 팀에 배정되어 여러 미션들, 로켓 발사 전 인스펙션에 필요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쪽 일을 배우게 됩니다. 플로리다 발사 미션이 대부분이지만 휴스턴과 캘리포니아 발사 미션은 직원들과 같이 이동도 한다고 합니다. 여름까지의 연수 과정을 매니저의 모니터링을 받으며 잘 소화할 시에 프린스턴 졸업 후 정식 발령이 나는 일정입니다. 출퇴근에 차가 필요해서 저와 같이 짐 싣고 22시간, 1박 2일 운전으로 캐너버럴 곶(Cape Canaveral)에 내려가는데, 아마 많은 이야기가 또 생기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지켜본 아들의 짧지만 긴 20년의 이야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