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글 황은미 변호사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 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발췌 –

<부드러운 직선>은 도종환 시인의 시집과 시의 제목이다. 어느 날, 시인은 이 시집을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게 선물하며, 그녀에게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박영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이라는 나의 질문에 박 전 장관의 답도 “부드러운 직선”이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로 직접 그 대답을 들으니 무척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부드러운’은 직선보다 곡선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던가? 수학적 정의로 따져 보니 ‘곡선은 직선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직선’이란 부조리한 것이 아닌가? 문학적 표현을 논리적으로 따져 묻자는 것이 아니다. 되려, 논리적 모순의 한계가 우리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내면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묻는 것이다. 시인은 깊은 산사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의 휘어지지 않는 정신, 즉 부드러운 직선에서 비논리적이지만 아름답고 강인한 자연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본 박영선의 아름답고 강인한 부드러운 직선은 무엇이었을까? 패기 넘치는 20대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박영선. ‘소련의 붕괴’, ‘서울-평양 위성 생방송’ 등 역사의 현장에선 “첫 번째”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시대적 부름에 과감히 그 명성을 버리고 정치의 길로 들어선 박영선.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전념하며 국민을 위해 봉사하였지만, 열 살배기 아이에게는 부족한 엄마였던 박영선. 가족과 함께 영화 보고 산책하며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그녀는 “백만송이 장미”와 “가시나무”를 즐겨 듣고 때론 콧노래로 흥얼거리기도 한다. 여느 중년처럼… 시인은 정치인 박영선이라는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이러한 일상의 면면들을 보았던 것일까? 사람, 여자, 엄마, 중년의 모습 속에서 부조리하고, 용감하며, 부족하고, 독특하고, 평범한… 부드러운 직선들의 강인함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지난 1월부터 하버드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 초청으로 Ash Center의 선임 연구원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박영선 전 장관과 “정치 이야기를 제외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 6월 5일 재외동포청이 출범하였습니다. 동포청은 재외 동포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동포들과 모국 간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50만 미주 동포를 포함한 750만 전 세계 한인 동포들의 기대가 큽니다. 

동포청의 역할에 대해 저도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동포청의 설립으로 정책과 행정이 효과적으로 이뤄져 동포들의 당면 문제들을 전략적으로 다루며 해결할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둘째, 수출 분야에서 동포들과의 협력이 더욱 긴밀해질 수 있을 겁니다. 동포청이 수출 분야 문제를 전략적으로 다루는 역할을 해주면, 재외 동포와 모국 양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미국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한국 문화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동포청을 통해 시행할 수 있는 유익한 아이디어일 것입니다. 한국의 최첨단 IT 인력과 관련 부분의 교류와 교육도 동포청을 통해 기획하면 매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됩니다.

1985년, 1995년에 이어, 이번이 미국에서 장기 체류하는 세 번째 시간인 걸로 압니다. 오늘날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80년대, 90년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1985년과 1995년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한국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크게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디지털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인공지능 Digital Democracy: AI in Politics’라는 주제로 발표했을 때,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질의응답 세션에서 통역을 했습니다, 즉, 영어로 질문을 받고 한국어로 답변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참석자들은 제가 한국어를 말한다는 사실에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그들에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까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한국 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과 책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더 많은 관심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한, 한국 언론의 역량 강화와 국민 개개인이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문화 교류에 참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공 지능(AI)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인공 지능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우려 또한 깊습니다. 특히, 사용자들의 데이터가 기반인 AI는 자본이 많이 필요한 사업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인공 지능 시대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며, 경쟁력을 확보할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비교해, 자본 집약적 인공 지능 사업에서 부족한 자본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와 소프트 파워 분야에 집중해 전략을 세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양자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등 중소기업만이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개발된 기술이 우리 일상에 가깝게 접목되고 활용하는 부분까지 고민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기업들이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기술을 개발할 수 있으면, 정부는 전략적인 정책과 지원을 통해 첨단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과 자본을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중소기업이 인공 지능을 활용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한 분야가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중소기업이 첨단 기술을 교육 분야에 활용하는 혁신적인 이니셔티브를 주도해야 합니다.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고 성장을 도모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1982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기자로 전직한 후 뉴스 앵커까지, 언론인으로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MBC를 통해 얻은 최고의 성과는…남편을 만나시게 된 것 아닐까요? 남편분과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1995년에 LA에서 특파원 시절, OJ 심슨 재판과 관련하여 미국 배심원 제도에 대한 인터뷰를 급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변호사 섭외가 어렵게 되어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미국) 변호사였던 남편이 유일하게 섭외가 되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기지를 발휘하여 지금의 남편을 MBC로 직접 가게 해서, 그곳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MBC에서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잘 끝내고 남편에게 사례를 하며, 미국으로 돌아가면 박영선 LA 특파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꼭 사주라고 당부했답니다. 그래서 만나게 되었고… 연애에서 결혼까지 이어지게 된 거지요(웃음).

박영선은 어떤 엄마였을까요?  

엄마로서… 좋은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국회 의원으로 재선되고, BBK와 관련된 사실을 파헤치게 되면서 의정 활동이 힘들수록, 검찰과 국정원 등이 지속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해 가족들이 한국에서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할 수 없이 10살이었던 우리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10살 된 아들이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된 거죠.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이, “그때 엄마가 굉장히 필요했는데… 엄마가 없었어”라고 그 당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무너무 미안하고,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이 깊은 후회로 남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비혼’을 주장했던 자기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반했나요? 그래서 홀랑 결혼했나요”라고 묻자 수줍게 웃으며 “홀랑…은 아니었고요(웃음)” 라 답하던 박영선 장관.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으니, 시인의 표현에 동의가 되었다. ‘부드러운 직선’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은 그녀에게 참으로 어울렸다. 보스턴에서의 시간과 연구가 박영선이라는 존재를 더욱 지지해 주는 또 하나의 ‘부드러운 직선’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