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자랑스럽게 만든 프로 댄서 이인영
글: 맘앤아이 편집부
photo by Anderson Ko
누구나 꿈을 꾸지만 모두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부딪혀 타협하다 숨고, 열정은 식고,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간다. 때문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밈이 이 세대에 감동이 되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미국 댄스 서바이얼 프로그램 ‘SO YOU THINK YOU CAN DANCE’를 TV로 처음 접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한 꼬마 아가씨는 그 무대에 서겠다는 맹랑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춤에 대한 열정 하나로 온갖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성장한 그 꼬마는 결국 태평양을 건너 4천명의 경쟁자들 사이에서 꿈꾸던 무대의 TOP 8에 오르며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알리는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위기를 감사로, 바램을 현실로, 꿈을 진심으로 대하며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세계적인 춤꾼 이인영씨를 맘앤아이가 서면으로 만나보았다.
맘앤아이 독자들에게 간단히 인사 부탁드릴께요.
안녕하세요. 맘앤아이 독자 여러분!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만 스무 살 때 큰 꿈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와 프로페셔널 댄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무가, 아티스트로 자리 잡은 이인영(A.K.A Dassy)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삶 절반을 동부 뉴욕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부 LA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너무 자연스럽게 춤에 빠졌어요. 8~9살 때부터 TV에 나오는 댄스 가수들을 따라하며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춤을 추다 빠지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로 초등학교 때 장기 자랑부터 시작해 중학교 때는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 더욱 전문적으로 춤을 추게 되었어요. 공연도 많이 하면서 중학교 졸업 무렵에는 더 넓은 무대로 나가야겠다 싶어서 그 당시 매우 유명했던 ‘위너스 댄스 스쿨’에 다니게 되었어요.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비를 냈어요. 그러다 경제적 부담이 커져서 스승님이었던 Lia Kim 언니의 팀원 모집 오디션에 도전, 합격하여 춤을 공짜로 배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저의 춤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타올랐습니다. 공연, 배틀, 백업 댄서까지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열정 하나로 춤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정말 순수하게 춤을 사랑했기에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뛰어난 재능으로 용기 있게 장기 자랑에 나서는 친구들이 꼭 있잖아요. 인영님도 그러셨을 것 같은데, 어떤 학생이셨어요?
당연히 저도 그런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원래 내성적이고 어릴 때는 더 내성적이어서 학창 시절 조용하게 그림만 그리며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춤을 추면서 외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춤이 너무 좋아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었는데, 장기 자랑 시간엔 댄스 가수 안무를 따서 친구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청소년 수련관이나 구청에서 열리는 공연에 초대되어 동아리 친구들과 퍼포먼스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동아리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기도 했죠. 엄마는 무척 내성적이었던 제가 춤 하나로 성격이 뒤바뀐 게 지금도 그저 신기하다고 하세요. 아무래도 신체적 활동을 하니 자연스레 친구도 많이 생기고, 공연을 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붙으면서 활발해진 것 같아요. 잘 안되는 동작이 있으면 제대로 잘 할 때까지 엄청난 연습을 하곤 했고, 그로 인해 인내와 끈기까지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 같아요. 춤은 제 인생의 동반자(?)이자, 삶에 대한 가르침을 준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홀로 미국행을 결심하셨어요. 한국에서도 길이 있었을 텐데 아무도 없는 미국으로 올 결심을 한 계기가 있었나요?
12살 때쯤에 미국 TV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곤 했는데요. 그때 인상 깊었던 프로가 ‘SO YOU THINK YOU CAN DANCE’였어요. 엄청난 감동과 함께 그 무대에 제가 꼭 서야할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받았죠. 그때부터 이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죠. 경제적 형편이 되지 않아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고등학교 졸업 후 1~2년 뒤에 미국에 왔어요. 정말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엄마 몰래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중학생 때는 피자 가게, 피시방, 카페에서 일했고, 길가에서 찹쌀떡도 팔아봤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일반 사무직, 알바로 바텐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오기 전에 춤을 추는데 솔직히 당시에는 춤으로 돈을 벌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정말 유명한 쇼핑몰에 웹 디자이너로 취직했는데요. 트레이닝 기간 3개월을 일해야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에서 3일을 일했는데, 매일 수당 없이 야근을 해야했는데 너무 너무 싫더라구요. ‘내가 좋아하는 건 춤인데 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바로 관뒀습니다. 엄마는 그런 저를 한심하게 여기셨지만, 제가 사랑하는 걸 꼭 밀어붙여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책임감은 없었지만 그만두게 되었죠. 아마 그 회사는 저를 정말 싫어했을 거예요. 꿈 하나가 어릴 때부터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흔들리지 않고 바로 미국행에 올랐는데요. 솔직히 그때는 전혀 무섭지 않았고, 열정이 너무 커서 무작정 돌진했습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웃음).
뉴욕에 도착해서 정착하기까지 어려운 일도 많으셨을 텐데요.
정말 힘들었어요. 한국에서 꼬박꼬박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이 정말 빨리 사라지더라고요. 살던 집에는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돈이 없어서 하루 세 끼를 1불 피자로 때웠어요. 그럼에도 항상 재정적으로 힘들어하시던 홀어머님 슬하에서 자랐기에 재정적으로 도와달라고 집에 말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댄스 컴피티션(배틀)에 나가 우승하고 상금을 타서 월세를 내곤 했습니다. 막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를 정말 너무 못해서(듣기와 쓰기는 조금 해도, 말하는 건 너무 서툴렀죠) 무시도 많이 당하고, 고생을 좀 많이 했어요. 처음 랭귀지 스쿨 다닐 때도 반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지만, 같이 만나 쓸 돈이 부족해 만나기가 힘들었는데요(뉴욕에 온 유학생들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죠). 춤을 통해 미국 본토 친구들도 많이 사귀면서 영어 실력도 많이 늘고, 외로워도 춤으로 금방 외로움을 달래며, 열정적이고 우여곡절 많은 뉴욕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4,000여 명의 참가자들을 제치고 TOP 10에 오른 신화의 주인공이신데요. ‘SO YOU THINK YOU CAN DANCE’에 지원하게 된 계기와 TOP 8까지 올라간 과정이 무척 궁금합니다
‘SO YOU THINK YOU CAN DANCE’는 어릴 적부터 저의 꿈이었어요. 뉴욕에 오자마자 바로 오디션에 지원하고 싶었는데 학생 비자 상태로는 오디션을 볼 수가 없어서 바로 지원 못 하고 4년을 더 기다려야 했죠. 그 기간 동안 다양하게 대회 경력을 쌓아 아티스트 비자를 받을 수 있었는데요. 비자를 받고 바로 LA로 이주해서 오디션을 보고 TOP 8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요. 스트릿 댄서로서 제가 좋아하는 팝핑이라는 장르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고, 한국이란 나라를 더 널리 알릴 수 있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발레와 컨템포러리, 볼룸 댄스는 연습해본 적이 없어서 제겐 그 장르들이 조금 어려웠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국과 캐나다를 투어하며 정말 즐겁게 지냈습니다.
심사평 중에서 “You made South Korea proud(당신은 한국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라는 최고의 심사평을 들으셨어요. 최고의 찬사를 들은 그 순간 어떠셨나요?
정말 정말 행복했습니다. 심사위원 나이젤(Nigel Lythgoe)은 어릴 적 이 프로그램을 봐올 때부터 쭉 계셨던 심사위원이었는데요. 정말 뜻 깊은 심사평을 그분께 들어서 너무 행복했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SO YOU THINK YOU CAN DANCE’를 하는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하루 10~18시간을 리허설에만 힘을 쏟고, 그 와중에 정말 많은 인터뷰를 하며 정신없이 임해야 했죠. 그래서 생방송 날이 다가오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는데요.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있다 보니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어요(웃음).
댄스 대회 수상 경력이 화려하실 것 같아요
배틀 대회나 안무 대회는 정말 많이 참가한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고, 미국에 와서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뉴욕에 와서 돈이 정말 급했을 때는 많은 상을 거머쥐었어요(웃음).살아야겠다는 마음에 악착같이 배틀에 임했던 것 같아요.
최근 활동과 근황이 궁금합니다
성격상 하나에 치우쳐 하는 것 보다 다양하게 하는 걸 좋아해요. 배틀도 많이 했고,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어요. 제 팀원들과 함께 시어터 공연도 많이 했고, 태양의 서커스, 레드불, 골든 스테이지 등 세계 각국에서 정말 많은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작년만 해도 춤 하나로 정말 많은 곳을 다녔는데요. 안도라, 스위스, 나이지리아, 남아공,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멕시코, 이비자, 시카고, 루이지애나, 시애틀, 워싱턴DC, 오클랜드, 프랑스 전국 투어 등 정말 많이 다녔어요. 미국 내에서는 다양한 광고 및 뮤직 비디오 촬영을 자주 하고 있고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아티스틱 컨셉을 잡아 개인 댄스 작품을 만들고도 있어요. 춤을 춰온 기간이 길어서 정말 다양한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한 가지만 오래 하면 싫증이 나기도 해서 공연에 집중하다가, 조금 싫증 나면 가르치는데 몰두하다가, 또 조금 싫증 나면 다른 것에 열정을 쏟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싫증났던 것도 다시 좋아지게 돼요. 춤 외에 그림 그리는 것도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요. 팬데믹 때에는 춤을 출 기회가 없어서 아트 비즈니스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셨어도 힘든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요. 그때마다 어떻게 극복하여 이 자리까지 오실 수 있었나요?
누구에게나 힘든 날은 찾아오는 것 같아요. 때문에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정말 중요한데요. 어릴 때부터 집안에 힘든 일이 많아서 무슨 일이 닥쳐도 긍정적으로 스스로 헤쳐 나갔던 것 같아요. 저는 엄마, 언니와 셋이서 서로 아끼며 살아왔어요. 아버지는 제가 한 살 때 암으로 돌아가셔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엄마는 홀로 두 딸을 키우시느라 항상 너무 열심히 사셨어요. 그걸 보며 재정적으로 조금 힘들게 커오다 보니 철이 정말 일찍 든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해도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뒤따랐고, 꼭 성공해 엄마가 행복해하는 자랑스런 딸이 되는 게 제 꿈이었어요. 그래서 힘든 일이 닥쳐도 엄마를 보면 힘이 났고, 꼭 성공하겠다는 오기로 잘 버텨냈어요. 잃을 것이 없고 올라갈 일만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31~32년 정도 살았지만 정말 어릴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실패도 많이 했고 여기까지 오기까지 정말 롤러코스터 같은 일들이 많았죠. 작년부터 최근까지 자서전을 열심히 써서 이제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요. 책은 2월이나 3월에 한국서 출판됩니다. 책에는 제가 살면서 겪은 수많은 위기와 그 속에서도 열정으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춤에 대한 저의 열정적 여정’을 세세하게 적어놓았습니다.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그리고 그 용기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 이루시기를 바래요.
곧 한국에서 출판될 자서전의 제목 및 자서전을 쓰시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책 제목은 아직 미정이예요. 책 내용은 여태껏 살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을 제가 느낀 그대로 적어낸 책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결심하고 실행하며 살아온 한국과 미국에서의 제 인생 경험을 적었는데요. 힘들었을 때, 그리고 행복했을 때 정말 다양한 감정들을 겪었기에, 이를 공유해 많은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어요.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출판사에서 제 이야기가 담긴 유튜브 영상을 보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 영상의 조회수가 2~3백만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보시면서 저와 같은 삶을 신기하게 바라보신 것 같아요. 춤추는 분은 많지만 어릴 때부터 꿈을 갖고 미국까지 와서 댄서로 활동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더욱 신기해들 하셨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제의를 받고 행복해서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그림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친언니와 함께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소극적이어서 항상 스케치북을 끼고 살면서 시간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어요. 소질이 조금 있었는지 지인들 모두 제가 그림을 전공할 줄 알았는데, 친언니가 그림을 전공하고, 저는 자연스럽게 춤의 길로 가게 되었어요. 춤에 몰두하면서 그림을 덜 그리기 시작했거든요. 춤에 대한 열정이 워낙 커서 그림에 시간을 투자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팬데믹 때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으로 유화 물감으로 페인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무언가를 그려서 그런지 너무 재미있었어요. 웹사이트까지 론칭하고 많은 그림을 그려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웹사이트는 dassyart.com이예요.
마지막으로, 꿈꾸는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아요.
꿈을 일찍 찾았거나, 아직 찾지 못하신 분들 모두 두려움 없이 많은 것들을 펼쳐 보길 바래요. 꿈을 일찍 찾았다면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임하길 바라고, 꿈을 아직 찾지 못하였더라도 여러 도전을 하다 보면 분명히 심장이 두근대는 무언가를 찾을 거라 굳게 믿어요. 힘든 일이 생겼다고 모두 내려놓지 마세요.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선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기회가 생긴 걸로 감사히 여기고 더 단단해 지세요. 강철 마인드와 마쉬멜로 같은 쫄깃하고 부드러운 심장으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라고, 진심으로 대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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