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와 대선 캠프에서 프리미엄 아시안 푸드 이커머스 마켓 창업까지
글: 맘앤아이 편집부
K-pop, K-beauty, K-food 등 우리의 상품과 문화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미국의 대형 마트인 Costco 나 Trader Joe’s 에서 다양한 한국산 제품과 직접 마주치게 되면 한국인으로서 으쓱해지는 어깨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는 어렵다. 김치의 날을 법으로 제정하는 주가 여럿 생겼을 정도로 미국 내 KOREA의 위상은 꽤 높다. 이런 흐름 속에 전국을 다니며 까다롭게 고른 품질 좋은 고추장, 된장, 간장, 참기름, 들기름 다섯 가지로 시작, 현재는 600여 종이 넘는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프리미엄 아시안 푸드 이커머스 기업인 김씨마켓(Kim’C Market)이 화제다.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바른 먹거리 찾기로 시작해 믿을 수 있는 친환경 프리미엄 식품을 발굴, 유통하게 된 김씨마켓의 창업자 라이언 김(Ryan Kim) 대표를 맘앤아이에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김씨 마켓을 시작하신 동기가 가족에 있다고 들었어요. 대표님의 가족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미국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이민 스토리도 들려주세요.
아버지는 학창 시절부터 아이스 하키, 유도, 스키 등을 즐기셨던 멋진 분이셨어요. 사교적이시고 영어도 유창하셨으며, 한국에서 사업을 일구신 후 정계 진출까지 큰 비전을 갖고 계셨어요. 반대로 발레를 전공하시고 훨씬 낭만적 성향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넓은 땅에서 자라길 강력히 바라셔서 아버지께서는 거의 반강제로 미국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친지들이 계신 뉴욕으로 오셨다가 이후 친구들이 많이 거주하던 LA로 옮겨 사업을 하시다 안타깝게도 교통 사고로 일찍 별세하셨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남동생, 저, 어머니 순서로 미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죠.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막막했어요. 당시 어머니는 40대 초반이셨는데 영어 사용도 불편하시고 갖고 계시던 자본도 얼마 없으신 데다 어린 아이 둘을 혼자 키우셔야 해서 어려움이 많으셨을 거예요. 하루하루가 도전이었고 낙담하는 경우도 잦으셨지만, 놀라울 정도의 헌신을 통해 저희 형제에게 항상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동생은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저는 아내 및 아들, 딸과 브루클린에 거주 중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오셨어요. 어떻게 오시게 되었고, 뉴욕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캘리포니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위해 홀로 뉴욕에 왔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진로로 금융 혹은 국제 기구나 유엔(UN)을 염두에 두고 왔어요. NYU에서 금융과 정치학 공부 후 처음에는 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미즈호(Mizuho)라는 은행에서 신용 파생 상품 리스크 매니지먼트 업무를 맡았고, 이후 미 상무부 산하 인구 통계국, 공공 정책 자문 회사, 기업 컨설팅 회사, 테크 스타트업 등 다양한 곳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월가를 거쳐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도 활동 하셨다고 들었어요. 대표님의 꿈을 접은 셈인데 미련이 남지는 않으신지요?
공공 분야와 공직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그걸 통해 사람들에게 더 쉽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모두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어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가장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가 정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에겐 창업을 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고, 지금 김씨마켓의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공헌”하려는 저의 비전을 실현해 나가고 있기에 미련은 없습니다. 이 사업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참기름, 들기름, 고추장, 된장, 간장으로 시작한 김씨마켓의 창업 계기가 궁금합니다. 다섯 가지 아이템을 창업 품목으로 시작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많은 분이 제가 처한 환경과 비슷하실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이민자이고 미국에는 가족들이 많이 없죠. 가족 친지가 있어도 주변에 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거예요.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유형이 대부분이죠. 그중 한 명이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 도움을 받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자녀에게는 미국이 삶의 터전인데 부모가 건강하게 자녀를 지켜줘야 하고 자녀도 건강해야 하지요. 아내의 막내 고모 가족과 매우 가깝게 지내왔는데 고모부께서 불과 마흔다섯 살에 돌아가셨어요. 여행도 함께 하고 고민도 털어놓고 운동도 함께 하는 등 참 특별했었기에 충격이 더 컸습니다. 장례식을 준비하며 남겨진 어린 두 아이와 제 아이 둘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고모, 고모부의 아이들은 한국과는 유대감이나 끈이 거의 없어요. 그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은 가족 중 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의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정말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식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던 제가 식품을 구입할 때마다 전성분을 꼼꼼히 확인하게 되면서 먹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했어요. 자연스레 좋은 원료로 만든 깨끗한 식품을 공급하고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지요. 처음에 이 다섯 가지 식료품을 택한 이유는 가장 기본이 되는 한식 재료이기도 하고, 경험이 부족한 우리 입장에서 유통과 보관이 쉬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럼 한인 대상으로 시작하신 건가요?
그렇진 않았어요. 모든 제품이 한국 원료로 만든 한국산 식품이었지만 한인 고객층을 목표로 할 마땅한 채널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탁월함은 어디에서든 빛을 발하며, 우리가 선정한 품목은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좋아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있는 공유 오피스 위워크(WeWork) 여러 곳을 다니며 시식 행사를 했어요.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김씨마켓 팀원들이 한식뿐 아니라 퓨전 요리 레시피 카드도 만들어 나누어 주었는데 무척 인기가 있었어요. 저희는 콘텐츠 생산에 많은 공을 들였고 뉴요커들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어요. 초창기에는 그렇게 한인 고객 비중이 약 20%, 미국인 고객 비중이 약 80%였습니다.
김씨마켓 시작 후 많은 에피소드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까다로운 식품 수입 절차로 인해 시행착오도 겪고 고생도 많이 했어요. 규모가 작아서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회사의 역량을 우리 기준에 맞는 식품을 찾는 것과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영어와 한글로 담아내는 것에 거의 모두 투입했습니다. 겨우 다섯 개 상품이다 보니 광고를 할 수도 없었고, 일반 마켓에서는 보지 못한 한국 식품이다 보니 주문이 아주 띄엄띄엄 있었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알람이 울리는데요. 조용히 각자 일하다 알람이 울리면 모두가 기뻐하며 서로 포장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포장에 소질 없던 저에게는 거의 기회가 없었어요(웃음). 초창기부터 새벽 배송을 고려해 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실제 서비스를 시행했습니다. 당시에도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주문 받고 단 25분 만에 딜리버리를 해드렸더니, 너무 빠른 배송에 고객으로부터 ‘나를 스토킹하느냐’는 농담 섞인 이메일을 받기도 했어요. 밤 10시, 오전 6시 50분까지 기다렸다 직접 딜리버리도 하며, 배송의 어려움을 유형별로 파악하고자 제가 자주 나섰는데요. 그 사실을 안 아내 친구가 나중에는 부담되어서 주문 못하겠다고 하기도 했었죠. 고객의 불만 이메일에 2시간 동안 답장을 써 보낸 것도 기억나요. 실수와 별개로 저희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죠. 일단 실수를 인정하고 저희가 선택한 생산자와 제품에 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자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한 번 더 써 보겠다”는 답장을 주셨고요. 한 달 뒤쯤 다시 이메일을 받았어요. 재주문했는데 만족스러웠고 맘카페에 추천 글도 올리셨다고요. 고객분께 만족스러운 경험을 드리고 싶었고, 잘 케어해 드리고 싶었던 마음까지 잘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몇 년간 이어진진 펜데믹 시기에 어떻게 운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회사 창립하고 거의 1년이 지난 2020년 3월, 뉴욕은 학교 문을 닫고 상가들은 폐업이 이어지는 시절이었지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매일 슬픈 이야기들이 전해지던 나날이었죠. 그런데 저희는 계속 주문이 느는 거예요. 외출이 어렵고 건강에 대한 염려도 커지다 보니 온라인 쇼핑으로 구입하는 추세였죠. 팀원들은 재택 근무를 했고, 한국으로 돌아간 팀원도 있어서 실제 주문 처리 인력은 저밖에 없었어요. 주문은 계속 늘어나고, 저 혼자 포장해서 UPS, USPS에 일부 가져다 주고, 뉴욕 지역은 직접 배달했어요. 당시 실직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포장과 배송을 도와 줄 인원 을 바로 채용해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해서 몇 달 동안 정말 혼자 많이 뛰어다녔어요. 회사는 적자 상태라도 성장 중이었는데 매일 매일 참담한 뉴스와 텅 빈 거리를 뛰어다니다 보니 슬픈 광경들을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죠. 밖은 정말 참혹했어요. 그래서 여기 비영리 단체에 현금 기부도 하고, 저희 식품, 스낵 등도 여러 봉사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 시기에 사업적으로 성장한 건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을 잃었거나 코로나로 고통받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죄송함 마음과 함께 더욱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를 함께 겪으며 김씨마켓의 정체성도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수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거느린 스타 오너 쉐프 장 조지로부터 김씨 마켓의 제품들을 인정 받은 이야기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에 어떤 품목들을 공급하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어느 금요일 오전 7시 30분, 장 조지의 오른팔격인 총책임자가 김씨마켓을 방문했어요. 저희 회사 내부를 모두 투어한 후에 45가지 품목을 구입하고, 장 조지가 직접 그중 44품목를 선정해 저희가 공급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미국 랭킹 1위 레스토랑인 아토믹스와 현대 자동차가 운영하는 제네시스 하우스 등 여러 곳으로 공급 중입니다. 신선하게 정미해서 드리는 쌀이 가장 인기 있고, 그 밖에 고추장 같은 장류와 김씨마켓 사이트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다양한 재료도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김씨마켓이 최고다!’하는 제품은 어떤 건가요?
기본적으로 가장 많이 주문하시는 품목은 쌀입니다. 쌀은 김씨 마켓의 철학이 담긴 시그니처 상품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생산된 쌀을 포장 그대로 가져오면, 저희도 설명 없이 그냥 팔면 되는, 쉬운 비즈니스가 됩니다. 그러나 좋은 쌀도 백미로 정미 되면 바로 산패 현상이 진행되어 맛과 향, 식감 등이 떨어져요. 쌀, 특히 백미는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하는 게 정석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분들은 거의 없지요. 그런 팁과 지식이 알려져 있지도 않고요. 소비자를 위한 판매 구조가 아니다 보니 20파운드, 심지어 40파운드씩 판매하죠. 대부분 집 안에 두고 드실 텐데 신선할 수가 없어요. 저희도 좋은 품종의 쌀은 비행기로 배송하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맛과 향과 식감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컨테이너에 각각의 다른 품종을 현미 상태로 직접 가져와서 고객이 원하는 대로 정미해서 전국으로 배송합니다. 고객은 품종, 무게, 분도 수(백미를 감싸고 있는 미강(bran)을 얼마나 깎을 것인가를 결정. 백미는 미강을 가장 많이 깎아낸 상태)를 선택해 주문할 수 있다. 좋은 쌀들도 섞어서 먹으면 맛이 없습니다. 쌀도 각각의 독특한 성질, 촉감, 식감, 맛이 모두 다 다르거든요. 쉬운 예로 나를 위해 로스팅 된 블루 보틀 원두를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주는 커피 맛과 푸드 카트 혹은 보통의 커피 맛과의 차이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쌀은 조금씩 정미해서 신선하게 먹어야 맛있습니다. 저희 기계로 정미해서 보내드리면 기존에 드셨던 쌀들은 아마 다시 드시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쌀은 신선 식품입니다.
미국에서 아시안이 처하게 되는 미묘한 한계를 극복하고 빠르게 성장하면서 하나의 성공 신화를 만들고 계신데요. 마지막으로 김씨 마켓은 앞으로 어떤 목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공과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다만, 김씨마켓은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나은 삶에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김씨마켓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좋은 퀄리티의 식품, 더 나아가 더 나은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고 싶어요. 김씨마켓을 많은 분들이 신뢰하고, 김씨마켓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어갈 수 있고, 실제로 그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 회사로 만드는 게 저의 비전 중 하나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미국 내에서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김씨마켓의 꿈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