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라는 무대 위에 한국인의 한(恨)을 풀어놓다

인터뷰/글 황은미 변호사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from the extreme theatre group Theatre No Theatre.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from the extreme theatre group Theatre No Theatre.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리듬, 감정, 정서가 있다. 굿거리장단의 엇박자가 그렇다. ‘덩기덕 쿵덕’하며 어깨춤을 살짝 추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메트로놈에 맞춰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억울함’이라는 감정도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화가 났을 때처럼 호흡이 거칠어지고, 속상할 때처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그것만이 또 전부가 아니다. 한민족의 한(恨)이라는 정서는 어떤가? 소설가 박경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恨)을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내포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恨)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펼쳐져 있는 길을 관통하는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날카롭고 예민한 울림을 만들어 내는 한(恨)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엄마와 할머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람에 쉬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취약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낸 세월이 오롯이 느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한(恨)이 아니던가? 어떻게 설명해도 부족하지만, 또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우리의 고유한 정서 

한(恨)을… 무대 위에 현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공연예술가 백현주는 (한국인이 아닌) 동료들과 함께 한(恨)에 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그 결과 연극 한!<HAN!>을 창작했다. 2023년 뉴욕 뉴저지에서 공연을 올린 그녀는 2024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투어와 2025년 미국 투어를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가, 런던에서 석사를 마치고, 서울과 영국을 오가며 배우, 연출가, 극작가, 프로듀서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녀는 현재 이탈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Theatre No Theatre에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Q. 맘앤아이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탈리아 Theatre No Theatre(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연예술가 백현주입니다. 연극 한!<HAN!>이라는 작품으로 2023년 2월부터 3월까지 뉴저지, 뉴욕에서 많은 관객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관객 열 분 중 한 분은 한인분들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귀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한인 관객분들에게 받은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맘앤아이를 통해 다시 한번 미주 한인 여러분께 인사드릴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Q. 연극 한!<HAN!>의 창작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연극 한!<HAN!>의 창작 과정을 설명하려면 제가 런던 유학 시절 만들었던 한영 합작 뮤지컬 이야기를 드려야 해요(웃음). 두 명의 영국인 작곡가, 영국인 작사가 한 명, 그리고 연출은 제가 하게 되었는데요. 창작 과정에서 드라마를 같이 쓰게 되었어요. 그 내용은…(웃음) 런던에 유학 온 한국 유학생 여자가 있어요. 영어가 서툰 그녀의 일상은 당연히 너무 힘들었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그녀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아파트를 공유해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런던 사람들이 좀비가 되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코미디예요. 뮤지컬 코미디(웃음). 연극 한!<HAN!>의 시작은 주인공인 유학생이 그 좀비들을 물리쳐야 하는데… 한국 유학생이 어떻게 좀비들을 물리쳐야 하나라는 고민에서 출발해요. 어떻게 좀비를 물리치지? 태권도(웃음)? 그러다가 한국인의 한(恨)을 무기로 생각하게 된 거예요. 2016년과 2017년에 한국과 영국에서 똑같은 대본을 가지고 쇼케이스를 했어요. 한국인의 한(恨)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한이 무엇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恨)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작품으로 쓰게 되었죠. 그때부터 연극 한(恨)!의 창작 여정이 시작되었어요. 15분 정도의 공연으로 시작했던 공연이, 2023년도에 뉴욕 뉴저지에서 공연한 연극 한!<HAN!>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Q. 코미디 뮤지컬의 한국 여자 유학생이 영국에서 만난 좀비들을 무찌르기 위해 고안되었던 무기가 백현주라는 공연예술가의 예술적 무기가 된 셈이네요?

공연에서도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요(웃음). 여자 주인공이 계속 고민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가 허락을 해주시면서 말씀하세요. 가라고… 이고 지고 끝까지 가보라고… 그렇게 허락해 주신 것이 한(恨)이예요. 그렇게 저의 무기가 되었…네요(웃음).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Performing artist Baek Hyunjoo

Q. 배우, 연출, 작가, 프로듀서를 총망라한 공연 예술가가 된 백현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제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전공하거나 업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결국 춤이나 노래를 전공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것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워낙 좋아해서, 취미로라도 무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늦은 나이였지요(웃음). 하지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늦은 나이에 시작한 탓인지 몸에 무리가 많이 되었고, 결국 공연을 앞두고 부상 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그때, 같이 연습하던 친구가 뮤지컬 오디션을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뮤지컬 앙상블 오디션에 지원하고, 합격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연이 <와이키키 브라더스> 공연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어요(웃음).

Q. 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공연을 하며, 배우, 극작가, 프로듀서 등 다양한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다양한 재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절대로 다재다능하지는 않습니다(웃음). 단지, 제가 잘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해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은 ‘창작’에 대한 열망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배우로 뮤지컬을 13년 정도 하고 나니 부상이 잦아지고, 또한 심해지더군요. 고질병이 된 허리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상황도 몇 번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가 뮤지컬 <시카고>를 꽤 오랫동안 했었는데, 그때 함께 공연한 동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현주야, 너는 <시카고> 공연하면서 죽을 것 같아… 너무 진지해”라고 하더라고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매일, 매우 진.지.하게 공연하는 저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때,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창작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제 안에서 발현되었어요.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영국 유학길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창작하고 싶어서 런던에서 연출과 제작(producing)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할 수 있는 것들을(연기, 연출, 제작 등) 병행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활동하다가 지금 제가 소속되어 있는 이탈리아에 가게 된 것이고요. 그렇게 ‘다양한 역할’을 해내게 된 것이지 재능이 다양해서는 아닙니다.  

Q.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인’ 공연예술가로서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한국인이어서 어려웠던 점은 어쩔 수 없이 ‘언어’인 것 같아요. 영어는 남의 말이니까요.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또 지나고 보니, 그 답답한 순간이 제게 상상할 기회를 줬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영어를 더 잘하면 좋겠다는 바람은 늘 있지만요(웃음). 

한국인이어서 좋은 것은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이에요. ‘한’이라는 정서도 제가 한국인이라서 가지고 있는 정서잖아요.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작품에 제가 판소리를 접목하려고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 작업을 준비하면서 판소리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데, 너무 멋있어요. 제가 우리 문화가 만들어낸 유산을 가져다가 쓰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정말 백현주다운 것이 되더라고요. 함께 공연하는 다른 나라 동료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져요. 제가 한국인이라서 저만 가지고 있는 문화니까요. 

Q. 공연예술가 백현주에게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에게 공연은 저 자신을 찾아가는 명상, 수련의 과정이고, 세상을 배우는 공부이며,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만남의 장인 것 같아요. 공연하면서 ‘연기’ 자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특히, 지금 소속되어 있는 Theatre No Theatre에서의 작업은 더욱 그렇고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수줍음이 많았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하고 대화를 이어가기가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도 어렵고, 사귀고 나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성격상 어렵고 그렇더라고요. 친구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하며 만난 동료와의 관계도 어려웠고, 하물며 가족과의 관계도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공연하면,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게 되고, 교감이 되었어요. 5년 동안 작품(한!<HAN!>)을 만들면서 조금도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무대에서 

‘투명’하게 저를 보여주려 노력하면서 공연하고 있는데, 관객들의 이야기가 동시에 들리고 보이는 듯했어요. 제가 무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동시에 객석의 그들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사람을, 타인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공연인 것 같아요. 저의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의 공연을 보고 관객분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그렇게 달라진 생각이 그들의 인생을 더 따뜻하고 의미 있게 바꾸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제가 열심히 저를 갈고 닦아야 해요. 그래서, 열심히 신체 훈련도 하고, 마음 훈련도 해요. 공연하지 않을 때도, 숨을 쉬는 모든 순간순간에도,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해요. 그렇게 해야만, 그분들에게 작은 울림이라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공연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딱 한순간만 뽑는다면?

2023년 뉴욕 뉴저지 공연이요. 정말 행복했어요. 특히, 공연할 때 관객들의 표정, 눈빛, 숨소리, 섬세한 미소와 웃음소리까지 그 차이와 이유를 예민하게 느끼면서 그들을 무대에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하는 이유구나’라고 느꼈어요.   

Q. Theatre No Theatre는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나요?

창작 활동을 하면서 워크숍을 많이 진행하고 있어요. 2024년도에는 미국 투어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투어가 잡혀있어요. 공연도 지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극단 대표 토마스(Thomas Richards)는 세미나도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뉴욕 뉴저지 한인분들께서 불러주시면 언제든 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웃음).

Q. 딱 10년 뒤에 오늘 이 시간 공연예술가 백현주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제가 10년 전에 뮤지컬을 하면서 한국에 있었어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그때처럼 열심히 창작 작업을 하고 있고요. 그러니, 10년 뒤에도 비슷하지 않을까요(웃음)? 저의 또 다른 마음은 ‘열심히 한다’는 것보다, 쿨하게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매 순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좀 뭐랄까…아등바등 사는 것 같아서요(웃음). 그런데, 그냥 제가 열심히 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10년 뒤에도 쿨하지는 못해도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아요(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공연예술가 백현주는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소설책을 내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말한다. ‘꿈을 좇아’ 한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나아가는 그녀는 여전히 꿈을 좇고 있다. ‘쿨하지 못한’ 그녀는 지독히도 열심히 또 그 꿈을 좇으리라.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소설책이 세상과 만날 것이라 확신한다. 백현주에게 백현주는 평생 풀어야 하는 숙제이기에,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평생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 그녀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세상에 내놓는 소설에는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을까? 소설가 박경리가 한(恨)을, ‘탄생에서 죽음까지 펼쳐져 있는 길을 관통하는 삶의 중심’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무엇’을 고스란히 담았을 그녀의 소설이 무척 기대된다. 아직 발간일이 먼 그녀의 소설에 이런 댓글을 미.리. 달아주고 싶다.

“백현주는 충분히 쿨 했다. 아등바등 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열심히 자신을 만나며 누구보다 행복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