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 맛본 오아시스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내일 촬영을 위해 얼굴에 팩을 올리고 잠자리에 누웠다. 옆에 남편이 말한다. 

아.. 믿겨지지 않아. 내일 자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랑 같이 촬영하는 거잖아. 기억나? 자기랑 나랑 한국에서 같이 Big Bang Theory’ 밤새 봤잖아. 근데 자기가 미국에 와서 그 배우랑 같이 촬영을 하는 거야. 믿겨져? 이 정도면 성공한 거야 자기야. 대단해”  

그 말에 피식 웃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이쁘게 말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촬영 전날이라 흥분되기는 했지만 그저 작은 역할이라 그리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저렇게 거창하게 말해주니 제법 내가 그럴 싸 하게 느껴졌다. 내일 같이 촬영을 하는 배우는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 아주 즐겨보던 인기 티브이 드라마의 여 주인공이었다. 그때 그 드라마를 보고 깔깔 웃으며 내가 미래에 저 여배우와 함께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인생의 재미 아니겠는가. 나는 내일 남편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 여배우와 만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같이 일을 하게 생겼으니 오늘 잠은 다 잔 것과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 세트장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 의상 핏팅 날(촬영 날 입을 옷을 미리 결정하고 사이즈를 추는 날) 이곳에 미리 와서 낯설게 느끼지 진 않았다. 내가 지금 들어가는 커다란 마치 물류창고 같은 빌딩은 영화, 티브이를 촬영하는 세트장이다. 그냥 박스 같은 건물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사람이 정말 살고 있는 것 같은 집처럼 꾸민 세트가 있고, 그 바로 옆에는 뉴욕의 한 레스토랑 같은 세트도 있다. 어떤 세트는 마치 무시무시 한 감옥 같기도 하다. 오늘 내가 촬영하는 세트는 한 클럽을 재연한 곳이었다. 이 텅 빈 공간에 진짜 클럽을 가져다 놨다 해도 믿을 정도로 소품과 조명이 빈틈없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기서 PA(덕션 어시스턴스)가 달려온다.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해주더니 보자마자 뭐 필요한 게 없는지, 아침은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내가 미안할 정도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챙겨 준다. 나를 데려간 곳에 문 앞에는 내 이름과 내가 오늘 연기할 역할 이름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촬영할 내내 쉬거나 대기할 나만의 공간이다. 방 안에는 나의 의상과 대본, 편히 신을 수 있는 슬리퍼, 가운이 있다. 이건 무슨 호텔에 온 것 같은 대접이다.  

역할은 정말 콩알만 한데, 오디션을 보고 역할을 따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울 일이다. 첫번째 오디션, 콜백, 홀드(홀드가 되면 최종 3명 정도로 추려진다), 그리고 디렉터, 프로듀서가 최종 후보에 남은 배우들 중 선택을 하고, 선택이 되면 그 역할을 따내는 것이다. 역할이 콩알만 하던, 주먹만 하던, 오디션을 보고 선택되는 과정은 같다.(사실 큰 역할은 콜백이 한번 더 있고, 카메라 테스팅을 거쳐야 하긴 하다. 티브이 쇼와 영화의 오디션 과정도 다르다.) 하지만 산 넘어 또 산을 넘어 이렇게 세트장에 오면 그때부터는 여왕 같은 대접을 받는다. 역할이 작아 촬영은 겨우 이틀만 하지만, 짧고도 짜릿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마치 유명한 여배우가 된 것 같은 대접을 받으면 그 힘들었던 역경을 쏴악 씻어내 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어쩌면 수많은 경쟁을 뚫고 힘들게 올라오는 게 당연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의상을 입고 분장을 마쳤다. 내 방에서 기다리다 PA가 부르면 세트장으로 가서 리허설을 한다. 연극은 몇 달간의 리허설을 하고 공연을 하지만, 티브이 쇼는 촬영 바로 전 카메라와 조명등 테크를 위한 리허설을 한번, 디렉터와 동선을 그리는 리허설 한 번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트장에 바로 촬영 레디로 와야 하는 것이다. 티브이는 모든 사람의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감독이 촬영 동선을 그어주고, 디렉션을 줄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 친다. 특히 작은 역할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긴장되는 순간이다. 실수 없이 내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 감독과 인사하고, 카메라 감독님과 인사하고, 블러킹(촬영 동선)을 그었다. 카메라와 조명이 준비되었을 때 저기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티브이에서 봤던 그녀. 어쩌면 그녀를 보며 내 꿈을 쫓아왔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내 눈에 슬로 모션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역시 리우드 배우는 다르다. 등에 조명이라도 달고 나오는 듯 빛이 났다.  

여신 같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나에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름이 뭐예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Elly라고 해요.” “Elly, 우리 오늘 재밌게 놀아봐요.” 그때서야 실감이 갔다. 어제 남편이 했던 말이. 그녀의 말대로 정말 재미있게 이틀간의 촬영을 마쳤다. 다행히 실수 없이 때로는 낯도 가리는 나에게 너무 편하게 해 준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촬영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며 내가 말했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와 남편은 아주 오래전부터 팬이었어요. 촬영 전날 남편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와 촬영한다고 나보고 그러면 성공한 거라고 용기도 북돋아줬고요. 좋은 경험 갖게 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더니 그녀가 말한다. 어머! 그럼 그냥 가면 어떡해요? 집에 가서 신랑에게 보여줄 사진 찍어야 죠! 빨리 핸드폰 가져와요. 여기서 기다릴요.”  난 내 인생에 아마 제일 빨리 달렸을 속력으로 내 대기실에서 핸드폰을 가져와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보여주자 남편이 하는 말. 우와.. 정말 여신이다.. 빛이나 빛이!”  거기에 나는 대답했다. 그치!! 근데.. 나는..?”   

활동 정보는 www.imdb.com/name/nm5579181/,@ellypie0623에서 확인 가능하다.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상 명대학교 연극과 졸업 후 한국 창작뮤 지컬 ‘뮤직 인 마이하트’, ‘당신이 잠든 사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오즈의 마법 사’ 등의 출연했다.

2011년 남편과 뉴욕으로 유학 온 후 뉴욕 필름 아카데미 졸업하고 아마존(Amazon), 에스티 라우더(EsteeLauder) 광고를 시작으로 TV Nexflix ’Unbelivable KimmySchmidt’ HBO 의 ‘THE DEUCE’ 그리고 2021년 HBO 개봉예정인 ‘THE FLIGHT ATTENDANT’등의 출연했으며, 영화는 ‘Till we meet again’ 과 수많은 작품상을 휩쓴 단편영화 Stavit Allweis 의 Cooking with Connie의 주연으로 출연했다.그 이외에도 여러 영화작품에 출연했으며 2021년 개봉 예정인 첫 헐리우드 진출작 ‘Supercool’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4년에는 평소에 즐기던 여행과 글쓰기를 병행해 민음사의 ‘축제 여행자’로 여행 에세이를 출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