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빨간 얼굴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오디션장을 도망치듯 달려 나와 칼바람이 날카롭게 부는 2월의 뉴욕 한복판을 마스카라 흘러내린 판다 눈으로 가로질렀다. 소매로 훔쳐도 훔쳐도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대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핸드폰을 꺼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관둘 거야. 이제 안 할래.” 

“무슨 소리야? 잘 못 본거 때문에 그래? 에이 왜 그래. 우리 한 두 번 이야?” 

“ 단 세 마디였어. 내 대사가. 근데 그게 안 나오는 거야 입에서.” 

단 세 마디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캐스팅 오피스들 중 하나인 곳이고, 그 유명한 캐스팅 디렉터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각인을 찍고 나온 것이다. 간호사 역 이었는데 세 마디의 대사가 모두 어려운 의료 용어 들이었다. 어제 대본을 받자마자 그 세 마디를 입에 붙이려고 수천번 연습했지만, 입에 잘 붙질 않았다. 사실 오디션 중에 대본을 손에 쥐고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대사를 내려다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대사가 단 세 마디 인데 캐스팅 디렉터에게 밑 보이기 싫었던 나의 오기는 나에게 굳이 그 부담감을 실어주었다. 대사를 연습하면서 입에서 중얼거리는데 자꾸 더듬어졌다.  그게 발원이 되었다.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 듯 뛰면서 마음속에 나쁜 생각들이 내 귀에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한다. ’너 지금 대사 까먹은 거야? 단 세 마디 대사를 지금 더듬는 거야? 오디션 방에 들어가서 대사를 까먹으면 어떻게 해? 아, 대본을 보면 되지 뭐.. 근데 세 마딘데 대본을 내려다볼 거야? 그러면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준비된 배우로 보겠어? 그러면 너를 절대 안 불러 줄 거야. 잘 보여야 하는데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순식간에 태풍처럼 몰려오는 불안감이 머리를 꽉 채웠다.  

“Elly Han” 

폭풍 속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웃음으로 맞이해준다.  

카메라의 빨간 불이 깜박였다. 내 앞에 내 상대역을 읽어주는 어시스턴드가 긴급한 목소리로 의사 역할의 대사를 읽었다. 나도 긴급한 간호사의 마음으로 대사를 하려는 찰나, 내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그냥 백지상태다. 내 손에 바로 대본이 있는데 그걸 내려다보지 못한다. 내 대사를 기다리는 어시스턴트와 카메라 뒤에서 나를 불안하게 쳐다보는 캐스팅 디렉터. 이 모든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지나간다. 몇 초가 지나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캐스팅 디렉터가 카메라를 껐다. 

“엘리, 괜찮아요? 문제 있어요?” 

“아.. 죄송해요.. 대사가..”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어려운 대사라서 안 그래도 배우들이 진땀 뺐어요. 기억 안 나면 그냥 대본을 내려다봐도 돼요.”  

“네…” “다시 갈게요!” 

카메라의 빨간 불이 다시 깜빡였다. 어시스턴트가 긴장한 나를 위에 더 긴급하고 리얼하게 의사 대사를 읽어준다. 제길, 다시 내 차례다. ‘대본을 봐. 괜찮아. 내려다봐.’ 마침내 대본을 내려다보는데 대본위에 쓰인 대사가 흐릿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대본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대사를 읽어 내려갔다. 드디어 나의 세 마디가 끝났다. 1분 남짓 지났 겠지만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10분은 더 지난 것 같다. 카메라가 꺼지고, 정적이 흘렀다.  

“I’m sorry..” 나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캐스팅 디렉터는 “Oh no! 걱정하지 마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긴장하면 그럴 수 있지. 방금 찍은 게 마음에 안 들면 10분 있다가 다시 들어와서 해도 돼요.”  

“아니에요… 다시 해도 못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슬펐고 화가 났다. 역할을 못 따내서가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목소리 따위에 설득당해 기회를 포기해 버린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날, 친구에게 그리고 내 남편에게 “나 배우 안해 이제. ”라고 선언했다. 내 배우 인생에서 역할을 따내지 못했을 때, 혹은 오디션을 잘 보지 못했을 때 수없이 ‘배우 때려쳐버릴까?’ 라고 생각한적은 있지만 진심으로 나에게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 선언한적도 없다. 처음으로 확고하게 ‘그만두자’라고 생각한 그날, 나는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시련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저려오고,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사랑하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지.’ 

당연히 나는 배우를 그만두지 않았다. 못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두어 달 동안 오디션을 볼 때마다 공포증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두어 달 동안 나는 배우로서 더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 내가 얼마나 배우를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의 작은 실수들을 비난하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감싸주는 법을 배웠다.  

그날 나의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다.  

“엘리, 왜 어린아이들은 백지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서슴없이 크레용으로 어떤 선이고 모양이고 그려내지만 우리 어른들은 백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곰곰이 생각만 하다 끝나는 줄 알아? 우리 어른들은 ‘잘 그리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서야.. 그 생각 때문에 우리 안에 자유로운 생각과 능력을 다 멈춰버리는 거야. 그저 잘 그리고 싶어서.” 

정답이었다. 나는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자유를 주기보다 부담을 주었고, 나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자유를 모두 차단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고삐를 내가 풀어 던지고 어린 아이처럼 자유롭게 달리기로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저 푸른 초원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게.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상명대학교 연극과 졸업 후 한국 창작뮤지컬 ‘뮤직 인 마이하트’, ‘당신이 잠든 사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오즈의 마법사’ 등의 출연했다.2011년 남편과 뉴욕으로 유학 온 후 뉴욕 필름 아카데미 졸업하고 아마존(Amazon), 에스티 라우더(Estee Lauder)광고를 시작으로 TV Nexflix ’Unbelivable Kimmy Schmidt’ HBO 의 ‘THE DEUCE’ 그리고 2021년 HBO 개봉예정인 ‘THE FLIGHT ATTENDANT’등의 출연했으며, 영화는 ‘Till we meet again’ 과 수많은 작품상을 휩쓴 단편 영화 Stavit Allweis 의 Cooking with Connie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영화작품에 출연했으며 2021년 개봉 예정인 첫 헐리우드 진출작 ‘Supercool’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4년에는 평소에 즐기던 여행과 글쓰기를 병행해 민음사의 ‘축제 여행자’로 여행 에세이를 출간 했다. 활동 정보는 www.imdb.com/name/nm5579181/, @ellypie0623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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