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ORY] 배우 한지혜_3부

3부 엄마 배우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배우로서 귀에 듣기 민감한 단어 두 가지가 있다. ‘나이’와 ‘아줌마’. 한국에서 여배우는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그때부터 미혼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멀어진다. 그런 고정관념이 내 머리에 박혀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캐스팅에서 나이를 묻는 것은 규칙에 따라 철저하게 금지되어있다.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배우의 나이와 관계없이 역량과 이미지로만 캐스팅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정도 배우로 자리잡기까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 한지 5년쯤 되자 양쪽 집안에서 손주 소식을 점점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내 남편은 외아들이다. 하지만 나의 배우 경력은 이제야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작은 역할이었지만 미국 드라마들에도 얼굴을 내비치고 독립 영화들에 많이 참여해 여러 감독들과 친분을 쌓아 차기 작품도 출연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이곳에서 경력을 쌓으려고 하는데 내 나이도 같이 쌓여가니 결정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때 마침, 나의 에이젼트 마리온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엘리, 나는 너의 재능을 믿고, 네가 크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엊그제 아빠가 됐고 나는 이제 할머니가 됐어. 내 손녀의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 삶을 이제 즐기고 싶다는. 나는 이제 일을 그만두고 내 삶에 집중하고 싶어. 내 가족과, 내 손녀와 함께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마리온을 나는 다가가 안아주었다.

나는 지금 막 에이전트를 잃었는데 오피스를 나서는 길에 따뜻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로 고민하던 나에게 마리온과의 마지막 미팅은 마치 하늘에서 준 싸인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다음 해에 엄마가 되었다. 아기가 나오면 다시 빨리 돌아가 배우 경력을 쌓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아기가 태어나고 나니 아기와의 시간에 푹 빠져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아기가 6개월 정도 되자 마음이 조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임신기간에 찍은 단편영화를 마지막으로 배우를 쉰 지 1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리온이 떠나 이제 에이전트도 없어 오디션이 들어 올 길도 없었다. (참고로 에이전트가 없으면 배우 유니언 오디션을 받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주변에 배우 친구들은 모두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정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밥 한 수저 먹지 못하고 아가와 하루 종일을 보내다 어느새 해가 저무는 오후가 되면 창밖을 내다보며 유리에 비친 내 부스스한 꼴이 보였다.난 정지된 걸까? 

아기를 낳기 1년 전에 출간한 여행책 ‘축제 여행자’를 읽고 좋아해준 독자 중 한 명이 내 소셜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도 자유로운 여행자가 엄마가 되어 남들처럼 아이 사진을 많이 공유하는 게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결국 작가님도 여느 엄마처럼 되는 모습이 보기 아쉽습니다.’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고는 홀랑 나는 자유를 버리고 사회를 따라 구속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또 화도 났다.‘아쉽기는 왜 아쉬워 자기가? 엄마가 뭐 어때서?’ 그렇게 생각하곤 갑자기마음이 초라해진다. 사실 나도 어쩌면 가슴 한구석에 그 독자와 동감하는 게 있어서일 것이고, 그의 말이 나의 자존감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를 낳고 빨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야지’라고 내가 나를 착각하게 만들고서 맞닥뜨린 너무나 다른 현실이 내 마음에 혼란을 일으켰다. 마음이 바빠졌다.

에이젼트 나잇(Agents night), 배우가 돈을 내고 10명의 에이젼트들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프로그램이다. 그곳에서 니콜을 만났다. 지금까지 나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니콜은 마리온과는 달랐다. 마리온은 내 안에 무엇을 보고 함께 걷자고 믿어준 에이젼트이라면, 니콜은 비록 사무적 일지 모르나 현실 적인, 이쪽 industry를 훤히 내다보는 배테랑이었다.

니콜과 같이 일을 시작한 이후 갑자기 오디션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결국 베이비 시터가 일주일에 세 번, 두세 시간씩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디션 일정과 시간이 천차만별이라 베이비 시터가 오는 날과 오디션 일정이 맞으면 다행이지만 그런 기적 같은 날이 없을 때는 하는 수없이 아기띠를 메고 아가와 오디션 장으로 향한다. 나서기 전에 공들여 한 메이크업은 아기띠를 메고 지하철을 타고 오디션장에 도착하면 다 뭉그러져 있다. 아가가 잠이라도 들면 행여나 깨서 울까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을 고친다. 가끔은 남편이 부랴부랴 회사에서 오디션 장소까지 와줘 아기를 잠시 맡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가 오디션장으로 와서 내가 오디션 보는 10분 간 아기를 잠깐 맡아주기도 했다. 아기띠로 구겨진 내 옷과 그와 같이 구겨진 나의 자신감으로 이미 진이 빠진 내가 오디션을 잘 볼 리 없었다.

좋지 않은 오디션 결과들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탓으로 돌렸다. 아가를 보느라 대본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기를 데리고 오디션장으로 가서 이미 내 혼이 빠져있었다, 내 머리가 엉망이었다, 내화장이 뭉그러졌다, 내 옷차림이 망가졌다 등등, 모든 이유를 다 댔다.결과에 실망하는 내 모습에 속상한 남편은 조금 더 쉬고, 아가가 조금 더 커서 수월해지면 다시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나는 바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렇게 나올 거란 걸 이미 알았다는 남편이 조곤조곤 말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봐. 당신이 그렇게라도 하루빨리 연기가 하고 싶어서 돌아간 건데 정말 그런 거 라면 당신 앞에 놓인 어떤 어려움도 이제 안고 가야 하지 않겠어? 모든 게 이제 변했는데, 왜 그렇게 뒤만 돌아보고 있는 거야?” 

그렇다. 나는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안 돌아갈 것이며 절대로 예전만큼의 여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하면 나를 실망시킬 일도 없는 일이다. 대본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면 잠을 더 줄이고, 아이를 데리고 오디션장으로 가야 한다면 뭐 오디션이 나에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혼이 빠졌다면, 그 혼은 약해빠진 혼일 것이며, 내 모습이 엉망이면 다시 정돈하면 될 일이다. 나는 이제 엄마이고, 배우이기도 하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뒤만 돌아보다 막상 앞을 보니 방법들이 생긴다. 오디션장에서 아가와 둘이 앉아 있다가 우연히 아기와 둘이 같이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오디션을 보고 아가와 함께 미국 내셔널 광고도 찍었고, 아가와 함께 영화도 찍었다. 참 마음가짐 하나 바꾸니, 모든 게 바뀌지 않는가?

세상에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불편하고, 귀찮고,힘드니까. 그런데 변화는 당연히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나도 엄마가 되고 나서 배우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많이 큰 것 같다. 나만 정지 한채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린 그저 모두 각자의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뒤늦게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그 독자에게 답장을 썼다. ‘독자님, 아쉬워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여느 엄마처럼 엄마가 되었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자유를 찾고 여행을 즐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까요.’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상명대학교 연극과 졸업 후 한국 창작뮤지컬 ‘뮤직 인 마이하트’, ‘당신이 잠든 사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오즈의 마법사’ 등의 출연했다.

2011년 남편과 뉴욕으로 유학 온 후 뉴욕 필름 아카데미 졸업하고 아마존(Amazon), 에스티 라우더(Estee Lauder) 광고를 시작으로 TV Nexflix ’Unbelivable Kimmy Schmidt’ HBO 의 ‘THE DEUCE’ 그리고 2021년 HBO 개봉예정인 ‘THE FLIGHT ATTENDANT’등의 출연했으며, 영화는 ‘Till we meet again’과 수많은 작품상을 휩쓴 단편영화 Stavit Allweis 의 Cooking with Connie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영화작품에 출연했으며 2021년 개봉 예정인 첫 헐리우드 진출작 ‘Supercool’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4년에는 평소에 즐기던 여행과 글쓰기를 병행해 민음사의 ‘축제 여행자’로 여행 에세이를 출간 했다. 

활동 정보는 www.imdb.com/name/nm5579181/,@ellypie0623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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