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지혜에서 배우 Elly Han 이 되기까지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배우를 시작 한지는 16년, 결혼한 지 10년, 엄마가 된 지 5년. 근데 제일 먼저 시작한 게, 가장 허덕이고 있는 듯 하다. 아내가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바람 치는 폭풍도 손 마주 잡고 잘 헤쳐나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 것 같고, 엄마가 되는 것은 5년 정도 지나니 고수 정도는 아니지만 넋이 나가 배가 고픈지도 몰랐던 시절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는데, 배우 생활은 제일 오래 했지만, 아직 내가 길고 긴 여정의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배우에 재능이 있는지 계량컵에 넣어 젤 수도 없는 일이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의 레주메를 보며 뿌듯해하다가도 빗장 치는 오디션들을 겪을 때면 좌절감이 온몸을 감싸 레주메 따위 쓰레기 통에 집어던지기를 얼마나 반복한 줄 모른다. 그래도 다시 고개빳빳이 들고 줄 창 걷는다. 그 이유는 우선 걷기 시작하기도 했고, 돌아가자니 16년 길을 돌아가기에 지금까지 이거 한다고 노력하며 든 밥값이 아깝고,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다음 정류장이 내 차례일 수도 있는 거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걸어가다 멈춰 뒤를 돌아보다가도 그냥 다시 걷는다. 내 것일 수도 있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나는 16년 차 배우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지만 지금은 여기, 뉴욕에서 배우로 활동 중이다. 이국 땅에서 내가 배우를하리라고는 계획을 한 적도, 꿈을 꿔 본 적도 없었지만, 나의 삶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고 덕분에 나는 더 큰 꿈을 꾸며 산다. 이 길을 가지 않았다면 태어나서 제대로 도전도 한번 못해보고 내 인생이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했을지 말이다. 무너져 보지도 못했을 거고, 나 자신을 그렇게 꾸중해 보지도 못했을 거고, 결국 나를 이만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 수없는 거절이 기다리고 있는 길인지도.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이것 만큼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게 없는 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걷다 보면 재밌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 시작할 때 옆에 바짝 붙어 박수 쳐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쳐 떨어져 나가는 걸 볼 수 있단 말이다. 나조차도 지치는데 그들은 얼마나 지치겠는가. 믿어 주고 그렇게 응원도 해 줬는데 난 아직도 그대들의 앞을 얼쩡거리고 있으니 한숨도 나올 일이다. 그렇게 한 사람한 사람 기대를 저버리고, 가족의 응원도 떨떠름해지고(특히 애기를 낳고 난 후에) 결국 이제 남편만 남았다. 아, 큰일이다. 그대에게 미안해서라도 잘될 일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바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학교동기들이 누가 제일 먼저 시집갈지 내기를 걸었다면 아마 내 이름에 돈이 제일 많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반전을 좋아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한국에서 막 뮤지컬이 붐이 됐을 때였다. 브로드웨이 공연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에서 해외 투어 캐스트들로만 했던 뮤지컬들이 한국 캐스트로 바뀌기 시작했던 시절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들도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극단 학전블루의 ‘지하철 1호선’이 샛별처럼 떠오르자 창작 뮤지컬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배우 최정원과 남경주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 ‘Cool’ 했던 시절, 나는 졸업하자마자 어린이 뮤지컬을 시작으로 운이 좋게 바로 한국 창작 뮤지컬의 파도를 7년간 타고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우 인생은 운이 반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노래에 별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하나가 있다면, 그게 노래인 것 같다. 참고로 나는 노력파 배우이다. 공연으로 족족 번 돈을 고대로 노래 레슨으로 가져다 붓기도 했고, 어떤 이가 던진 ‘밤 새 잠을 자지 않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만의 공명을 찾을 수 있다’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 되는 미신을 믿으며 며칠 밤을 새웠다.

돌아온 것은 피곤함에 찌든 갈라지는 목소리뿐. 춤을 추는 것은 즐거웠지만나에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럼 노래가 모자라니 캐릭터 하나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수없는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기도 했지만 또 합격하기를 반복 해 공연그리고 다음 공연을 이어 가며 뮤지컬 배우로서 아주 작지만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나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난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홀가분하게 뮤지컬 무대를 떠났다. ‘Cool’ 한 것을 따라왔던 것이지 두근거림을 따라온 것이 아니었던 걸 그때 드디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뮤지컬을 그만 둘 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근데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석사를 하겠다는 모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다. 마침 그 때 난 여행 책을 집필하고 있었던 때라 어디로 떠나자고 하면 말이 떨이지기무섭게 짐부터 쌌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뉴욕으로 건너왔다. 오자마자 남편은 공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나는 주로 혼자 타임스퀘어 TKTS 부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화려한 광고판들의 번쩍임을 응시하며 내 얼굴이 저 전광판에서 함께 번쩍이는 상상을 했다. 안될 일 없지 않은가. 연못에서 헤엄쳐 봤는데, 바다에서 헤엄치지 못하라는 법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바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가 그 연기가 그 연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무대 연기를 오랫동안 했던 나는 카메라 프레임에서 자꾸 벗어나 교수님께 혼난 적이 셀 수도 없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스크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새로운 연기법을 접했다.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바꾸려니 고집만 생겨서 다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채웠다. 신기한 건 시작한 이후로 두근거림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 두근거림을 동력으로 여기서 10년을 걸어왔다.

영화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빨리 세상으로 나가 타임 스퀘어 한복판에 내 얼굴을 올리고 싶었다. 예전에 뮤지컬을 하며 존경하는 선배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결국 모든 예술가들의 생명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견딜 수 있느냐에 달린 거야. 이제 곧, 올해는, 내년에는, 이 작품을 잘하면, 다음이나 일 것이라는 ‘Hope, 희망’과 끊임없는 자기비판 사이에서 싸울 수 있는 ‘Confidence, 자신감’만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생명(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이야’

사실 그때 선배가 ‘왜 당연한 말씀을 하시며 멋있는 척하시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젊었고, 젊음의 무기는 희망과 자신감이니까. 그렇게 겁 없고 당찼던 나의 희망과 자신감이 꾸깃꾸깃 한 영수증처럼 쭈그러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졸업하자마자 나는 공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에이전시를 찾았고, 단편영화와 프린트 광고들을 찍었다. 제법 나의 길에 빛이 쬐이고 있었다. 나의 첫 에이전트 Marion. 그녀는 40년간 뉴욕에서 에이전트로 일을 한 베테랑 에이전트였다. 유명한 에이전시에서 독립해 그녀의 클라이언트들을 모집하고 있던 중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와의 처음 미팅에서 내가 준비한 모놀로그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녀가 하이 피치의 목소리로 말했다.

“ I want to work with you. You have that sparkle I have been looking for!”

그렇게 Marion 은 나를 미국에서 배우의 세계로 데려다준 에이전트다. 그녀가 나에게 처음 던져 준 오디션. 뉴욕 배우로 성공하려면 꼭 거쳐가야 한다는 드라마 Law and Order의 희생자 역할이었다. 대본을 달달달 외우고, 자신 있게 오디션 장으로 갔다. ‘나는 미국에서 드문 동양인 배우고, 그러므로 난 제2의 루시 루가 될 것이다’라고 되새기며 당당하게 오디션 장으로 향했다. 대기실의 문을 힘차게 여는 순간, 내 동공이 무한히 확장되고 되새긴 말들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진다. 대기실 의자에 나랑 똑같이 생긴 배우들이빽빽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똑같이 생기다 못해 모두들 제2의 루시 루 같아 보인다. 첫 오디션인지라 모든 게 낯선데, 그들의 눈빛은 이미 베테랑이다. 우물쭈물 누구 옆에 앉아야 할까 고민하다 좀 덜 세보이는 배우 옆에 조심스레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 깨달았다. 그 선배가 했던 말씀을, 그분이 말했던 자기비판과 싸워 이길 수 있는 Confidence(자신감)의 뜻을 말이다. 이미 대기실에서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그리고 당연히그 역할을 따 내지 못했다. 좋은 결과는 결코 그냥 오지 않는다. 나 자신과의싸움이고, 거기서 이겨야 내가 가진 탤런트를 보여줄 기회가 생긴다. 그렇게 쭈그러진 첫 오디션으로 나의 좌충우돌 뉴욕 배우 인생이 시작되었다.

글, 사진 한지혜(Elly Han)

상명대학교 연극과 졸업 후 한국 창작 뮤지컬 ‘뮤직 인 마이 하트’,’당신이 잠든 사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오즈의 마법사’ 등의 출연했다. 2011년 남편과 뉴욕으로 유학 온 후 뉴욕 필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아마존(Amazon), 에스티 라우더(Estee Lauder)광고를 시작으로 TV Netflix ’Unbelievable Kimmy Schmidt’ HBO의 ‘THE DEUCE’ 그리고 2021년HBO 개봉 예정인 ‘THE FLIGHT ATTENDANT’에 출연했으며, 영화는 ‘Till we meet again’과 수많은 작품상을 휩쓴 단편영화 Stavit Allweis의Cooking with Connie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영화 작품에 출연했으며 2021년 개봉 예정인 첫 할리우드 진출작 ‘Supercool’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4년에는 평소에 즐기던 여행과 글쓰기를 병행해 민음사의 ‘축제 여행자’로여 행 에세이를 출간했다. 

활동 정보는 https://www.imdb.com/name/nm5579181/,인스타 그램 @ellypie0623에서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