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Rock 전인권’
짧은 만남, 긴 여운
락의 황제로 불리는 전인권씨의 뉴저지 공연이 있는 날이다. 공연 전에 그와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있었기에 늦을세라 서둘러 공연장(bergenPAC)으로 달려갔다. 콘서트를 주최한 ‘스튜디오 파브’ 담당자가 리허설이 너무 길어진다며 걱정을 한다. LA 에서도 6시간이 넘도록 리허설을 하고 3시간 공연한 다음 곧바로 뉴저지로 날아와 아침부터 종일 연습 중이라며 혀를 끌끌 찬다.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 게다가 시차까지 견뎌야 할텐데… 기자도 덩달아 걱정이 앞섰다. 인터뷰 최가비, 사진 Mee Rainny
2층 분장실 앞에서 리허설이 끝나길 기다렸다. 식사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인터뷰를 서둘러달라는 주최측의 권고가 야속하게 들릴 즈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전인권씨가 나타났다. 대충 돌려 묶은 긴 백발에 짙고 강렬한 썬글라스, 범상치않은 예술적 콘트라스트의 셀러버리티 포즈(Celebrity Poses)가 마치 한여름 열기처럼 훅! 나를 밀치고 지나간다. 시쳇말로 후덜덜 그 자체다. 놓칠세라 재빨리 분장실로 따라들어가 엉거주춤 수인사를 건넸다. 결코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인사를 나누면서도그는 인터뷰에 그닥 관심이 없는 눈치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아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미주공연이 처음이시라고 알고있어요. 소감이 어떠세요?
어… 그러니까 사실 한 32년 전에 왔어요 한번. 그런데 우리공연이 아니었고 게스트라 잘 몰랐는데 이번엔 약속대로 다 이행되서 너무 좋아요.
주어도 술어도 분명치 않은 어눌한 말투, 소위 ‘전인권 화법’이 이거구나 혼자 키득 웃었다. 도우넛 박스에서 빵 하나를 꺼내 쑥 내민다. 내가 손사래를 치자 한입 베어물고 우물거린다. 기자와 시선을 맞추는 일은 별로 없다. 인터뷰가 쉽지않겠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LA공연 마치고 바로 오셨다구요.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전인권씨 개인적으로는 미주 첫 공연이신데 이번에 오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
원래 미주공연 계속 하고싶었죠. 비자가 문제였죠. 관광비자로 와서는 못하니까. 제가 과거에 좀 사고치고 그래서 어려웠어요. 이번에 박원순시장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셔서 비자를 받았어요.
한국에서의 콘서트 무대와 해외 공연은 마음가짐이 좀 다르실 것 같아요.
한인이민자 그런거 생각 안하고 그냥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했어요. LA에서 감동이 되더라구요. 다 막 따라불러주시고.
최근 몇 년 전부터 세월호, 촛불집회, 쌍용자동차 집회, 또 평창올림픽 등 ‘사회적인 무대’ 활동을 많이 하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월호와 촛불집회는 제가 참여하고 싶어서 했어요. 이유는 아실거에요 보통일 아니었잖아요. 어린애들이 정말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사회적 활동은 요즘들어 갑자기 하는 것은 아니고 옛날부터 들국화는 사회적으로 환영받던 그룹이 아니었어요. 군부정권이 있어서 그랬지만 방송국에서도 우린 왕따였죠. 다행히 국민들이 사랑해줘서 들국화가 살아있는거죠.
왜 대중들이 전인권씨의 음악에 열광할까요? 자신의 음악에는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몰라요. 저는 노래를 꾸며서 부르는게 아니라 있는대로 단순하게 불러서 더 전달이 잘 되는거 같아요. 19살 때였는데요, 미국 빌보드 월간 팝송으로 좋은 음악들이 다 들어오는데 왜 우리는 이런음악 못할까 생각했어요. 그런거 하고싶더라구요. 원래는 그림할려고 했고 음악하고싶지 않았는데 조각하시는 이일우씨라고 그 분이 저를 좋아해서 노래를 하나 만들어주셨는데 제목이 ‘헛사랑’이에요. 근데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가수해야겠다 생각한거죠. 그런데 허튼짓 하느라 제대로 활동 못했어요. 이제는 약도 완전히 끊었고 걱정말아요 히트되서 다행이죠.
데뷔하신지 무척 오래되신 것으로 아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를 꼽으신다면요?
정식 데뷔 35년 됐고요 지금 예순 다섯살이에요. 요즘 한국도 나이 생각 안하고 살아요. 이번 LA 팜스프링스 공연 참 좋았어요. 같이 노래불러주고 너무 좋았죠. 굳세어라 금순아 부를 때 우셔서 뭉클했어요.
들국화는 정말 마법처럼 대중들을 사로잡았다는 기억이 있는데요, 이 후 오랫동안 매체에서 뵐 수 없다가 몇 년 전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어요?
사실 젊은날 그냥 지나갔어요. 오히려 지금이 20대 같아요. 들국화하고 뭐 그냥저냥 세월 다 보냈죠. 작년에 표절얘기 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화가 많이 났었죠. 내 인생에 그런일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어요. 집에서 문 잠그고 나오지도 않고 우울증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바깥세상 안 믿기로 결심하고서야 회복했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음악하는게 제일 좋은거거든요. 연습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저녁 8시면 자요, 잠오는 약 먹고 6시간 정도는 자요.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연습해요. 좋아요.
사실 전인권씨 정도면 세계무대로 진출하셔야 하지 않을까하는 개인적인 바램이 있는데요, 외국 무대나 외국에서의 버스킹 같은 것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세계 무대 욕심있죠, 그래야 후배들도 더 발전할 수 있구요. 사실 버스킹 이야기 많이 들어요. 집사부일체라는 TV프로했는데 난 버스킹인줄 알고 했거든. 곧 한다고 하긴 하던데. 저는 발리나 유럽, 네덜란드같은 나라 그리고 공원같은데서 하고싶어요.
요즘 가수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이 무척 많은데요 선배로써 어떤 생각이 드세요?
무지많죠. 정말 많아요. 선배로써 걱정이 굉장히 많이 되요. 요즘 애들은 오락을 많이해서 음악도 그렇게 할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쨌거나 음악적으로 발전 많이 할 거 같아요.
음악 외에 즐거움이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일, 또는 시간을 꼽으신다면요?
그림 그릴 때요.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즐기는게 아니라 남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잖아요. 문화생활 즐기기가 어렵죠. 저는 그림 그릴 때 좋아요.
데뷔 때도 그랬고 30-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수로써의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계신데, 앞으로 목표나 계획같은게 있으시다면요?
오랫동안 음악하겠죠. 그러다가 힘이 떨어지면, 한 70 정도 되면 양평같은데 40-50평 되는 집 사서 벽화그리고 싶어요. 제가 그림 하나 보여줄게요. 색연필로 우리 멤버들을 다 그렸어요. 이걸 보여줘야 사람들이 내가 그림 그린다는 걸 믿더라구. 그림과 음악은 같이 못해요. 집중력이 필요한거라. 요거 보세요 우리 베이스키타 치는 친군데. 저는 음악도 미술도 다 독학이에요. 나중에 그림 그릴거에요.
그림이야기를 하는 그의 낯빛이 갑자기 환해졌다.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잔잔한 격정에 들떠있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셀폰을 열고 갤러리에 차곡차곡 모아둔 그림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넘겨가며 기자에게 보여줬다. 크로키로 묘사된 그림들이 단박에 전인권 밴드의 멤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10년쯤 뒤, 어쩌면 우리는 가수 전인권이 아닌 화가 전인권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재미진 상상을 잠시 했다. 그림 한장 사진으로 남겨 맘앤아이 독자들과도 함께 나눴으면 좋았을 것을…아쉽다.
이번 공연에 어떤 곡들 준비하고 계시나요?
‘제발’, ‘사랑한 후에’, ‘걷고 걷고’, ‘걱정말아요 그대’ 로드 스튜어트의 ‘세일링'(Sailing),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하고 몇 곡 더 부를거에요. 최선을 다할거에요. 음악하는 것이 이렇게 즐겁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껴요.
스태프들이 몰려와서 인터뷰 마무리를 재촉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서둘러도 전인권씨는 별 요동이 없다. 맘앤아이 잡지를 들고 사진까지 찍어주며 기다리던 스태프들의 속을 태웠다.
대중들은 때로 아티스트의 작품을 통해서, 혹은 연주를 통해서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될 때가 있다. 마이크 앞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아마도 꾸밈없고 가식없는 그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번 무대를 통해, 그의 노래를 통해 전인권씨의 순수한 내면이 전달되고, 그와 관객이 인간적인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공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분장실을 나서는 그에게 나는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그는 별 반응이 없었고 내 엄지는 한참을 허공 중에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