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up Exhibition 바람(Wind): 강종숙, 임충섭, 최성호, 김영길
그림 읽어 주는큐레이터
지천에 좋은 갤러리가 즐비한 문화와 예술의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도, 밖에 나가 작품을 즐기며 고급 인프라를 누리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교통, 날씨, 바쁜 스케줄, 컨디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이렇게 추운 겨울엔 더 그러하다. 여기 독립 큐레이터로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전문가가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찾아가는 전시, 즉 전시회를 가지 않고도 글과 사진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맘앤아이의 ‘그림 읽어 주는 큐레이터’를 통해 오늘은 편안하게 집에서 그림들을 감상해 보자. 오늘의 전시회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4인 작가들의 그룹전으로서 전시 주제는 ‘바람’ 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기권 안에는 공기가 있고 이 공기가 움직이며 생기는 속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입니다. 이렇게 공기는 움직임이라고 하는 시간을 타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공기의 움직임을 시간성으로 보고 ‘바람’이라고 하는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바람을 간직한 4인 한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이들 작가들이 여러분들께 선사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오는 시원한 한 줄 바람이 아닌 작가들이나 우리들의 기억에 그리고 마음에 간직된, 오래 전에 만났던 바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먼저 두 눈을 감고 바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귓가에 그리고 피부에 바람이 느껴지나요?
혹은 예전에 느꼈던 그 바람이 떠올려지나요?
그 바람과 함께 들었던 노래, 그 바람과 함께 만났던 사람, 그 바람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여름이 익어가는, 해가 뜨거운 낮 시간에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집니다. 추운 겨울에는 겨울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를 일으키는 겨울 바람에 푹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주 많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 기억 속의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다릅니다. 문화도 문명도 그리고 우리가 숨쉬는 공기도. 공기가 다르니 공기를 움직이는 바람도 다르겠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각각 다른 바람을 느끼고 가늠하며 사는 우리들.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의 바람을 기억하고 있기에, 가끔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잊지 않고 꺼내어 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자, 지금부터는 제가 도슨트가 되어 작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일 먼저 갤러리에 들어와서 볼 작품은 도예가 강종숙 작가 의 <Manhattan in Apple> 이라는 제목의 대형 설치 작품입니다.강종숙 작가의 도자기로 만든 사과 설치 작품은, 이민자로서의 우리들이 미국 땅에 살며 피부로 느껴온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처음 이 땅에 도착했던 그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들은 정말 많은 바람을 겪어 왔습니다. 사과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표현하는날개들은 일벌이 되어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의 이민사를 보는 듯합니다.설치를 보면 제일 윗줄에는 날개가 없이 동그란 그림자만 가진 작은 알들이지만,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조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두 날개는 점점 길어지고 밑으로 처지는 모습들이 형성되는데, 이는 일벌같이 살아온 이민자들의 인생입니다.
처음 이 땅에 도착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쌓은 경험으로 날개가 돋아나고 활발하게 일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은 연륜으로 날개는 점점 길어지지만 동시에 점점 기력이 빠져 날개는 밑으로 처지게 되고 결국 우리 개개인의 이민자들도 맨 아랫줄 왼쪽의 검은 알처럼 긴 날개만을 남기고 사라져갑니다. 이민자들의 일벌 같은 삶을 바람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Untitled, 1984, tempera, graphite, slate, 48″ x 70″
하얀 세라믹 설치와는 대조적으로, 짙고 검은 설치 작품이 자리를 잡고 있는 벽으로 이동을 하겠습니다.
최성호 작가의 설치작품 <무제>는 1984년도 작품으로, 35년이라는 시간을 잠자고 있다가, 오늘 우리 눈앞에 도도한 자태를 자랑하며 시크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소재는 건축 자재로 사용했던 슬레이트인데, 건물 철거 중 떼어 내면서 깨어진 파편들을 가져다가 그 위에 연필에 사용되는 흑연과 템페라라고 하는 재료로 칠을 하여 만든 작업입니다. 작품 표면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깨어진 부분의 날카롭거나 거친 면에서 나타나는 질감, 이렇게 두 상반되는 표면의 질감 차이를 대조적으로 드러내어 마이너로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느끼는 이질적인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35년간 나무 박스 안에 포장되어 보관되어 오다가 이 전시를 위하여 상자를 열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오래된 바람,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듯 작품의 표면에 살짝 희미하게 피어 있던 곰팡이는 오랜 세월 간직한 바람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작품의 멋진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숯같이 검은 5개의 조각들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설치가 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명이 더해져 벽면에 나타나는 그림자는 겹쳐진 부분과 아닌 부분에 따라 음영의 짙음에 강약이 더해져 실제 조각과 벽면의 그림자가 어우러지면서 3차원적인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조각들의 간격과 조명 위치, 그리고 빛의 강도에 따라 매번 다른 느낌의 작품으로 설치될 수 있다는 것이 매력 포인트이지요.
이 작품이 더 깊은 맛을 품어 낼 수 있는 것은, 지나온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맞아온 바람이 더하여져 한층 성숙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35년 전 작품을 현재 꺼내어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를 하여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거나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더 세련되고 중후한 멋을 간직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