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힘은 감정조절에 있습니다”
트라우마 전문가, 뉴욕의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유난히 길던 겨울을 뚫고 봄이 왔습니다. 날씨는 따뜻해졌는데 아직 얼어붙은 마음 한구석이 있다면 봄과 함께 녹여 보는 건 어떨까요? 세계적인 정신분석 연구소인 NIP(National Institute for Psychotherapies)의 슈퍼바이저, 심리상담 플랫폼 카운슬러 코리아의 창립자이자 뉴욕, 뉴저지에서 심리 치료 정신분석 클리닉을 운영하는 권혜경 박사가 맘앤아이 스튜디오를 찾았습니다.
정신분석가가 알려주는 유아기의 중요성과 정신건강을 지키는 법. 함께 들어볼까요?
인터뷰/글 : 김지원 에디터
트라우마 전문가인 권혜경 박사가 말하는 감정조절
트라우마, 즉 심리적 외상이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후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부적응적 반응을 일컫습니다. 즉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반응을 가리키는 것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돼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내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분이 트라우마 환자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별일 아닌데 저 사람 유별나다’ 라고 치부하는 건데요. 이건 트라우마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개인마다 히스토리가 다르고, 감당할 수 있는 감정도 다 다르기 때문이죠. 맘앤아이 독자분들께도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누군가 힘들어하는 것을 본다면, 내 시각에선 아무것도 아닌 거처럼 보여도, 대상자는 힘들 수 있음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사건, 사고와 맞닥뜨린다. 막을 수 없다면 이에 압도되거나 휩쓸리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화가 나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화가 난 상태를 견딜 수 있는 것, 슬프지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슬픔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감정 조절이다.
감정 조절 능력은 유아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은 0~5세 유아기에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필요한 경험을 충분히 제공하면 감정 조절을 잘하는 아이, 건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 누구나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막을 수는 없지만,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견딜 힘이 생기는 거죠.”
인간의 뇌 기능은 만 2세 이후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권 박사는 생후 2년간 부모가 아이의 뇌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즉, 0세~2세까지 유아가 울음으로 표현하는 수면욕, 배고픔, 신체적 불편함 등의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5세 이상이 되어야 시간 개념이 생깁니다. 특히, 2세 이전의 유아들은 모든 걸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아기가 배가 고파서 우는데 엄마가 10분 후에 준다고 말하면 아이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10분 후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죠. 지금 느끼는 불편함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과 공포에 갇히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수면 교육을 하는 미국에서는 부모와 어린 자녀가 함께 자는 한국의 코슬리핑 문화를 미개하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 코슬리핑을 비롯해 동양의 육아법이 아이들 성격 발달과 신경계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엄마의 민감성과 민첩함으로 아이의 불편과 고통이 빠르게 편안한 상태로 전환되는 경험을 자주 하면 아이는 불편한 상태가 되어도 다시 편안한 상태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ADHD? 성격장애?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요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가운데는 우리 아이가 자폐나 자폐 스펙트럼이 있진 않은지, ADHD는 아닐지 걱정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권 박사는 한국에선 마치 유행처럼 ADHD나 성격 장애 검사를 받고, 병원에서도 진단을 많이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ADHD와 불안 증상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DHD의 주요 증상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한 행동을 보이는 것인데요. 인간의 뇌는 안전하다고 느껴야 집중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사교하며, 남의 말을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면 우리 몸은 상황을 위협으로 감지하고 싸우거나 도망을 가는 ‘Fight or Flight’ 모드가 올라오게 됩니다. ‘적이냐 아니냐’, ‘생존이냐 위협이냐’, 그것만 신경쓰게 돼요.”
“귀, 즉 중이에 있는 뼈와 근육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타이트해져서 고주파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사람 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서 ‘Fight or Flight’ 모드가 되면 이 뼈와 근육이 느슨하게 돼 저주파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즉, 사람 소리 보다 주변 소리와 소음에 포커스를 맞추게 돼요. 왜냐하면 동물적 본능에 의해 그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난다던 지, 야단을 많이 맞는다던 지, 잦은 비난이나 잔소리가 아이에게 위협으로 느껴져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아이의 몸과 마음이 닫히게 되고 저주파 소리가 들리는 동물적 뇌가 작동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선생님이나 엄마의 말보다 누군가 지우개 떨어뜨리는 소리, 밖에서 누군가 걸어가는 소리가 더 잘 들리게 됩니다.”
권 박사는 아이들의 이런 증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 없이 원인도 찾지 않고 문제적 행동만 고치려 하거나 약물 치료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심리 치료는 적극적으로 받고, 뇌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 사용에는 신중하기를 권고했다.
육아 그리고 엄마의 정신 건강
“육아를 하고 계신 엄마들에게 ‘당신이 지금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어요.
특히, 엄마들은 죄책감을 참 많이 느껴요. 아이를 키우면서 순간 참지 못하고 한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또다시 닥치는 순간순간을 견디기가 쉽지 않죠. 산후 우울증이나 육아 우울증을 겪는 경우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내 아이라도, 엄마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동물의 뇌가 아이를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나를 살리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권 박사는 엄마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육아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지 못한 배우자와 가족의 문제, 독박 육아를 하게 만든 사회 시스템적인 문제로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힘들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요. 엄마가 힘들지 않게 육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팁을 드리고 싶어요. 이건 절대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엄마가 편안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감정조절을 위한 What to do.
“심호흡은 감정 조절에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오래 내쉬는 심호흡을 자주 해주세요. 그럼 올라오던 교감신경이 부교감 신경으로 바뀌어 몸이 진정되고 생각하는 뇌가 작동하게 됩니다. 심호흡과 스트레칭, 명상은 평소에 꾸준히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데모하던 여대생, 정신 분석가가 되다.
권혜경 박사는 이화여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제도적 변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중 노래 한 곡이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침 미국에서 유학하던 친구가 한국에 들어와 권 박사에게 소개한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뉴욕대에서 음악 심리 치료로 석,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세계적 정신분석 연구소인 뉴욕의 NIP(National Institutes for Psychotherapies)에서 정신분석가 과정을 밟은 후 트라우마 정신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 맨해튼과 뉴저지 포트리에서 ‘권혜경 심리치료 정신 분석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카운슬러 코리아’를 런칭하여, 더 많은 사람이 실력 있고 따뜻한 상담가와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했다.
온라인 심리 상담 플랫폼 – 카운슬러 코리아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매년 여름이면 한국으로 가 트라우마 심리 치료 워크숍을 해 온 권혜경 박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뉴욕에서 한국어가 가능한 트라우마 치유 전문가로 활동하다 보니, 전 세계에 사는 한국인들로부터 상담 문의가 왔어요. 시간적 한계로 모든 내담자를 도울 수 없어서 안타까웠는데요. 이 내담자들을 제가 직접 교육하고 임상 훈련한 실력 있는 상담사들과 연결해 주면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상담 서비스를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실이 ‘카운슬러 코리아’입니다”
‘카운슬러 코리아’는 권혜경 박사가 설립한 트라우마 교육기관인 싸이컬러지 코리아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심리 상담 플랫폼이다.
“한국어로 편하게 상담을 원하시는 뉴욕, 뉴저지 한인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가족은 나의 힘
싸이컬러지 코리아와 카운슬러 코리아의 공동 창립자인 길무근 대표는 권혜경 박사의 남편이다. 뉴욕 유학 생활 중 만난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고, 카네기 멜론을 졸업한 후 뉴욕 월가에서 스탁 브로커로 일하던 남편에게 함께 일하자며 끊임없이 구애를 펼친 건 권 박사였다. 따뜻한 마음으로 권 박사의 길을 적극 지지해주는 길 대표는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누구보다 힘이 되는 든든한 파트너이다. 스무살이 된 첫째 딸 채연양은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대학에서 부전공으로라도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둘째 딸 소리양은 밝고 활기찬 성격으로 엄마 잔소리가 부끄럽다고 타박하는 귀여운 사춘기 소녀다.
자신에게 친절하세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권혜경 박사가 맘앤아이 독자들에게 남긴 당부도 사실은 위로였다.
“스스로에게 더욱 더 친절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며 빨리 스스로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되면 빨리 나를 좋은 사람으로 승격시켜 주세요. 나쁜 사람은 나쁜 짓을 하게 되지만, 좋은 사람은 나쁜 짓을 잘 할 수 없거든요. 스스로를 더 이해하고 보듬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