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터뷰 김향일 에디터 사진 21희망재단
지난해 코로나 19가 미주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많은 한인 스몰 비즈니스들이 문을 닫거나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특히 정부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서류 미비자들에게 지난 한 해는 지옥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뉴욕시에만 약 1만 5천여 명의 성인 서류 미비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구제가 당장 시급했던 지난해 그래도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이 있으니 바로 21 희망재단이다.
21 희망재단은 코로나 19 팬데믹 발생 직전인 2019년 12월 설립됐다. 21대 뉴욕 한인회장을 지낸 변종덕 이사장이 본인 재산의 대부분인 220만 달러를 기부해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이제 일선에서 은퇴하면서 재산도 다 정리를 했고 연금 받고 내가 살집이 있는데 돈이 뭐가 필요해. 자식들 한테도 나 죽으면 이 집 하나 남을 거라고 했어.”
21 희망재단은 지난해 재단 측에서 직접 출연한 21만 달러와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통해 기부받은 돈 17만 달러를 합쳐 총 38만 달러를 서류 미비자 가정과 각 자선단체들, 그리고 장학금을 위해 썼다.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은 서류 미비자 550여 가정이 도움을 받았고 나눔의 집, 주님의 식탁, 사랑의 집, 노아 선교회, 밀알선교회 등에게도 기부금을 전달했다.
변종덕 이사장이 특별히 서류 미비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87년 일거야. 당시 조병창 회장이 뉴욕 한인회장을 하던 때인데 그때 한인회에서 복지재단을 만들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내가 그 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았었어. 그런데 그때는 미국에 홀로 와서 일을 해 번 돈을 한국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야. 하루는 한 신문기자가 연락이 와서 청과업을 하던 사람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같이 가 보자고 해서 가 봤더니 암 말기라 3개월도 못 산다는 거야. 미국 온 지 10년이 됐는데 그동안 본인은 쪽방에서 자면서 힘들게 일해 매달 800불씩 한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면서 살아오다 그렇게 병을 얻은 거지. 그래서 마지막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죽기 전에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얘기가 신문에 크게 실리고 한인사회에 큰 이슈가 됐지.”
그래서 당시 뉴욕한인회 복지재단 이사장이었던 변종덕 이사장은 본인이 직접 나서 가족상봉을 위해 한국에 있는 아내가 미국에 올 수 있도록 주선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비자 발급은 물론 해외여행도 쉽지 않던 시절, 그 남성이 서류 미비 자라는 이유로 그의 아내는 비자 발급이 두 차례나 거부되면서 미국에 오는 시간이 점점 지연되고 있었다. 그때 변종덕 이사장은 주한 미 총영사에게 연락해 사연을 전했고 그 아내는 바로 비자를 발급받아 뉴욕으로 올 수 있었다.
“근데 너무 안타까운 건 그 아내가 존 에프 케네디 공항 상공에 있었을 시간에 그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떠난 거야. 결국 부부가 상봉하지 못하고 그 아내는 남편의 시신만 마주하게 된 거지.”
이후 비자 발급이 늦어져 결국 부부가 만날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주한 미 총영사는 변종덕 이사장의 주선으로 가족상봉 행사를 추진했다. 서류 미비자이지만 10년 이상 미국에 떨어져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매년 10명씩 선정해 한국의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해 서로 만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이 행사를 위해 미 총영사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특별히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렇게 매년 한국에서 가족들이 와서 서로 만나면 완전 눈물바다였지.”
변종덕 이사장은 이 가족상봉행사를 3년 동안 진행했고 이후 당시 이 일을 위해 특별비자를 발급해 주었던 미 총영사와는 각별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법적으로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서류 미비자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져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번 21 희망재단 설립 목적 중 하나로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지난해 그는 15명의 학생들을 선발했는데 그중 3명은 알 샤프톤 목사가 대표로 있는 내셔널 액션 네트워크(National Action Network)와 유색인종 협의회(NAACP) 맨해튼 지부가 추천한 흑인 장학생들이었고 이들에게 1인당 2,500달러 씩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바로 한인과 흑인사회 간 유대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변종덕 이사장은 1990년 당시 한인회장 시절 뉴욕에서 한인과 흑인 간에 발생했던 분규를 해결한 장본인이다. 1990년 1월 브루클린에 있는 한국계 소유 청과물 가게인 패밀리 레드 애플에서 물건을 훔친 아이티 출신 이주 여성이 종업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흑인들의 불매 운동과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몇 년 전부터 지속된 한 흑 갈등이 이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때 마침 흑인으로 처음 뉴욕시장에 당선된 데이비드 딘킨스가 한 흑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경찰들도 흑인들의 시위를 미온적인 태도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한인사회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흑인시장이다 보니 흑인 편만 드는 거야. 한인들은 무서워서 장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시청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했지. 그게 9월 18일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당시 그 시위를 9.18이라고 불렀어. 미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고 그날 시청 앞에 한인들이 무려 만 2천 명이나 모인 거야. 시청으로 가는 지하철, 도로가 그날 완전히 마비가 됐어 말도 못 할 정도로 모인 거지.”
변종덕 이사장은 그날 한인들이 모이기 전 딘킨스 시장과 직접 통화를 통해 3일 안에 경찰들에게 흑인들의 시위를 진압하도록 명령하지 않으면 시장 보이콧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딘킨스 시장은 이날 만 2천 명이나 되는 한인들이 모여들자 결국 시위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연설을 하면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딘킨스 시장한테 이런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소수민족들 간에 이해가 부족해서니까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한국 방문을 주선할 테니 시장이 직접 추천을 해 달라고 했지 그래서 그때 시장이 12명을 추천해 준거야. 그래서 한인회 간부들이 경비를 모아서 당시 총 30명이 한국에 갔지”
당시 선발된 흑인 지도자들은 라미레스 뉴욕주 의원과 레이스 맨해튼 교육위원, 맥 로힌 흑인 복지회 연합회 이사장, 맥리어리 채널 5 앵커 등 12명이었고 이들의 한국 방문으로 한 흑간의 인종갈등도 일단락됐다.
그 외에도 변종덕 이사장은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당시 장애인 올림픽에 참석하려던 미국 선수단을 위한 후원회를 열기도 하고 한인을 총으로 쏜 사건 수사를 뉴욕 시경이 내 몰라라 하자 한인회에서 만 5천 달러 현상금을 만들어 범인을 검거하기도 했다. 이때 변종덕 이사장은 뉴욕시경 간부들을 초청해 감사패를 전달하는 등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대 한인들의 인권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난 정말 이상해(웃음) 내 주변에서는 항상 일이 터져. 그래서 일 복도 많고 거기다 내가 손이 커서 뭘 하나 해도 적당히가 안돼(웃음)”
뉴욕의 한인 이민역사는 60년이 넘었다. 과거 척박한 이민사회 속 그 자리에 있었던 이런 선배들의 노고가 오늘날 우리가 미국 주류사회에 자리 잡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은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변종덕 이사장은 올해는 질병이나 사고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서류미비 한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서류미비자들은 보험이 없으니까 큰병에 걸리면 병원비가 몇 만불이나 나온다고. 그리고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면 가족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 그래서 물론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거지”
매일 아침 등산을 한다는 변종덕 이사장, 그는 오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곳이라면 부지런히 76살의 노구를 이끌고 바삐 돌아 다니고 있다.
변종덕 이사장은 1960년대 한국에서 가발사업을 크게 하다 사양길에 접어들자 1970년 도미했다. 그는 뉴욕시 일원에서 슈박스라는 신발 체인 매장을 운영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제21대 뉴욕 한인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그의 사재 220만 달러를 기부해 21 희망재단을 설립하고 불우한 한인들을 돕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