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을량 Digital Producer

미국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들이 한국사에 대해 좀 더 알려줄 수 있도록 Fun Facts 시리즈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최 근 계속되는 발굴과 연구를 통해 한국사 교육 내용이 많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아빠들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아빠가 먼 저 읽고 아이한테 얘기해주거나 나란히 앉아서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빠들이 읽어주는 재미있는 역 사 이야기! 시작합니다.

06 코리아는 고구려?

Korea (Corea)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에 알려진 게 언제부터일까? 유럽에서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언급한 건 13세기 몽골에 다녀온 이탈리아 수도사의 기록이야. Corea (코리아/꼬레아) 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건 16세기 전후로 생각되는데, 고려를 뜻하는 Core (꼬레)에 나라, 땅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어 -a()가 붙어서 만들어졌다고 해.

◀ 1673년 영국인 John Ogilby가 펴낸 “A New Map of Asia” 지도에 나온 Corea [출처: 컬럼비아대학]

10세기 초부터 14세기 말까지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였고, 그래서 그 시기의 이름이 알려질 것이라고 추측하지. 그런데 사실은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건국한 고려는 기원전에 생겨난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거야. 고구려가 가장 강력했던 5세기에 공식적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로 바꿨고, 그전에도 고려와 고구려를 섞어서 썼어. 당시 발음은 아마도 “가우리” 또는 “고리”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한자 표기로는 고려라고 했지. 이외에도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나라가 스스로 고려라 국호를 정했지만 가장 오래 존속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태봉, 발해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 당시 사람들은 그 모든 나라를 고려라고 했을 거야.

 

▶1689년 네덜란드 지도학자 Johannes van Keulen가 만든 “map of the East Indies” 지도 의 Corea [출처: 위키피디아]

TMI 1: 비슷한 맥락으로 고려 왕조 몰락 이후 1392년 이성계가 세운 조선도 단군이 건국한 최초의 우리나라 고조선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인데, 구분하기 위해서 단군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거야.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일 뿐, 당시에는 그냥 조선이었다는 얘기지.

TMI 2: 고구려 시조가 부여에서 나왔듯 부여의 시조는 고리국(탁리국, 색리국이라고도 해)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부여는 최소한 기원전 200년경에 이미 강력한 국가였으니까 코리()라는 이름 자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말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지.

07 백제 왕의 성은 부여?

▲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한성백제 유적 ‘석촌동 고분군’ (사적 243호) 전경 [출처: 경향신문]

백제의 건국 신화를 알고 있니? 부여를 도망쳐 나와 세력이 없던 추모왕(주몽, 동명성왕)은 사실 졸본 지역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지. 그런데 추모왕에게는 부여에 두고 온 아들이 하나 있었어. 훗날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이 되는 이 아들이, 기원전 19년 무렵 추모왕이 부여에 남겨두고 온 증표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와. 어린 유리 왕자가 부여에서 아버지가 남겨 둔 증표인 부러진 칼자루를 찾아 산 넘고 물 건너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유리가 세자에 책봉되고 소서노는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하는데, 그중 온조가 지금의 서울하남 지역으로 추정되는 위례를 도읍으로 삼아 백제를 건국하게 돼. 이후 백제는 웅진, 사비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 시기 백제를 서울의 옛 이름을 따서한성 백제라고 부르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성은 고씨지. 고주몽. 그런데 원래는 해주몽이었어. 전설에만 나오는 이름이긴 하지만 추모왕의 아버지가 부여 왕 해부루라서 성이 해씨였는데, 왕이 된 후 고씨로 바꾼 것이지. 비류나 온조의 아버지가 추모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어쨌든 성은 해씨였다고 해. 온조 역시 왕이 된 후 성을 바꾸게 되는데,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라는 뜻에서 부여씨로 바꾸지. 잘못 알려진 삼천궁녀 이야기의 주인공 의자왕은 풀네임이 부여의자였던거야

TMI 1백제는 538년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 이름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꿨을 만큼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강했지사비성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인데 고려 시대부터 부여라고 불렸다고 해다만 왕실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백제 인구의 대다수는 부여 지역 출신보다는 한반도 토착민들이었을 가능성이 커. 7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신라계고구려계가야계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쪽 사람들도 상당수 유입되었을 테니 부여의 후예라는 의식이 과연 얼마나 널리 퍼져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

TMI 2부여는 고조선 말기 고리국 사람 동명왕이 세운 나라인데한반도 북쪽에 적어도 700년 이상 강성했던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중국 역사 기록에도 자주 나오지그런데 그 기록만큼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지 않아서 그동안 알려진 게 많지 않았는데 최근 많은 부여 추정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고 하니 지켜보도록 하자.

08 신라 금관은 데스마스크?

 

아마 많은 사람에게 신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분명히 아름다운 신라 금관이 있을 거야. 드라마에서도 나오는 그 사슴뿔 같은 옥 장식 주렁주렁 걸려 바깥쪽으로 펼쳐진 모양의 금관은 당연히 보통 왕관처럼 머리 위에 썼을 것 같지?

▲ 머리에 금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 드라마 속 신라 여왕의 모습 [출처: MBC]
▲ 황남동 120-2호분 발굴 당시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등의 배치 [출처: 문화재청]

그런데 금관이 발굴될 때마다 얼굴을 반쯤 덮는 위치에 놓여있었고, 바깥쪽이 아닌 안쪽으로 휘어져 있는 모양인 경우가 많았어. 그래도 지금까지는 금관이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있었던 탓에 위치나 모양이 조금씩 어긋나서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금관은 특별한 때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는데, 최근 귀걸이, 목걸이 팔찌에서 허리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장물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황남동 120-2호 고분 발굴로 금관은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덮는 형태로 착용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생전에 썼다기보다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서 씌우는, 일종의 Death Mask(데스마스크)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힘을 얻고 있어.

▲ 카자흐스탄 보로보에 유적에서 나온 황금 보검(왼쪽)과 경주 계림로 고분에서 나온 보검(오른쪽) [출처: KBS]

TMI 1: 지금까지 세계에서 발견된 순금 금관은 14개로, 그중 10개가 한국에서 나왔어. 대부분이 신라 금관이지만 가야, 고구려 지역에서도 금관이 나왔고 순금이 아닌 금동관 또한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어. 그 밖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 발견된 틸리아테페 금관의 경우 나무와 새 등의 상징과 제작 기법 등에 유사한 점이 많이 있어서 고대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로인초원의 길을 따라 전파된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어.

TMI 2: 신라 문무왕 비문에 따르면 자신들은 흉노의 왕족이었던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김일제는 중국 한 무제 시절 흉노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패해 한나라에 볼모로 잡혀 온 사람이지. 왕의 말을 돌보는 노비가 되었으나 위기의 순간에 왕의 목숨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씨 성을 하사받고 지역의 제후에 봉해졌다고 해. 김일제의 후손이 왕실에 반기를 들었던 이종사촌과 엮여 동쪽으로 도망쳐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만약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서 이후 한반도에 이르러 김씨 왕족이 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지만 아직까지 신라 왕실과 흉노의 관계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어. 다만 한무제가 김일제에게너희 흉노는 본래 금을 좋아하니 내 너에게 금()씨 성을 내린다라고 하며 김씨 성을 내렸다는 것은 사실인데,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 이름이 김알지였고-” 또는알ㅊ-” 로 시작하는 접두어가 흉노가 있던 알타이 지역에서 금을 뜻한다고 하니, 관계가 있기는 한 것 같아. 앞으로 계속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져서 사실관계가 좀 더 밝혀지길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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