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동안 떨어져 있던 아이들 볼 생각에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다. 일찌감치 공항 게이트에 와서 아이들에게 selfie 몇 장을 전송했다. 작은 아이에게서 바로 문자가 날아왔다. “Daddy, the woman behind you is not wearing a mask. Please tell her.” 아이가 좀 더 어렸을 적 등굣길에 뉴욕 지하철을 함께 타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아파트 문을 나오면서 “열쇠는 챙겼어? 핸드폰 어딨어?”, 전철이 들어오면, “절대 가까이 가면 안돼 아빠!”잔소리가 이미 아내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년만에 재회라서 그런지 딸 잔소리가 왠지 싫지 않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하는 “큰 소리”보다 시도 때도 없이 재잘대는 “잔소리”에 전통시장 같은 사람 사는 정겨움이 스며있다.
이번엔 혼자 거의 24시간을 기내에 있어야 하는 먼 여행이라 영화 보는것이나 잠자기 말고 별다른 옵션이 없다. 평소 볼 기회가 잘 없는 다큐멘터리 리스트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것이 “Les Glaneureset la Glaneuse”(심지어 영어도 아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렸더니 “The gleaners and the (female) gleaner” “이삭 줍는 사람들과 이삭 줍는 자”이런 제목의 프랑스 다큐영화이다. 새벽시장이 끝나고 폐장하는 시간에 나타나서 상인들이 팔다 버리고 간 야채나 음식물들을 수거해 가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기도 하고, 하루 영업이 끝난 빵집이나 슈퍼마켓 건물 뒤에 늘 나타나는 이들, 수확하고 난 농토나 과수원에 와서 떨어진 과일들이나 감자, 볏짚 같은 농작물을 가져가는 사람들을 담담히 카메라에 담고 있다. 물론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분들이 많지만, “거지”나 “홈리스”가 아니라,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게 놀라웠다. 음식물을 수거해 가는 이들만 등장하는 게 아니었다. 못쓰는 가전제품이나 버리는 가구를 길에 내놓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쓸만한 것”들을 거두어 다시 고치거나 재생해서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특이한 “고물”을 모아 모던한 조각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도 있었다. 영화의 포인트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었다. 보통 “더럽고 버려진 찌꺼기 같이 보이는 것들” 이 저 gleaners들 에게는 삶을 유지하는 귀중한 원천이고 다른 이들을 돕는 유용한 수단이며, 멋을 창조하는 예술 혼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재료다. 고급스러운 진열대에 가격표와 스캔코드가 붙어있는 상품이 아니라, 바닥에 버려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모았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화감독 자신이 스스로를 gleaner로 칭한 것도, 이 다큐 작품 전부 다른 이들의 이미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가 끝난 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단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신명기 24:19-22)
사회적 하층계급이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배려를 읽을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 더욱 놀랍다. 불우 이웃돕기 하듯 통조림과 물건을 모아서 갖다 주는 게 아니다. 들로 밭으로나가면 거기에 그들을 위한 양식이 놓여 있다. 스스로 자신들이 삶을 일구어 감으로 관리대상이 아닌,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존감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밀레의 유명한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의 배경을 보면 뒤쪽 멀리 몇 명의 일꾼들과 함께 이미 추수를 끝낸 곡식 단들이 높이 쌓여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쪽 뒤로는 주인인 듯한 사람이 말을 타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세 여인이다. 멀리 일꾼들과 주인은 그림의 배경일뿐이다. 비록 추수가 끝나 황량해 보이지만, 마치 그 넓은 들판은 전부 여인들의 것인 양 그들 앞에 상처럼 차려져 있다. 아마 밀레는 성경 말씀처럼 이삭 줍는 이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표현한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사태로 온 세계가 앓고 있다. 2020년 한 해가 거의 다 가고 있는데도 힘든 상황이 어디까지 일지 끝이 잘 안 보인다. 많은 이들이 건강을 잃었고, 직업을 잃었고, 심지어 귀중한 목숨을 잃은 분들도 수없이 많다. 과거 좋았던 때, 정상적인 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모두가 기다리고있다. 그런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많이 들린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분명히 많은 이들에겐 재앙의 시간이라고 기억되겠지만, 뜻밖에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 있다. 세계 최악의 미세먼지로 뿌연 대기에 휩싸였던 인도에서 맨눈으로 히말라야를 볼 수 있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바닥이 보이지 않던 베네치아 운하를 따라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IT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코요테가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창조주는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팬데믹이라는 황량한 곳에 우리 모두 서있다. 혹시, 이 팬데믹 들판은 제2의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터에서도 초연히 꽃을 피어내는 역사는 무수히 일어났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 되어 든든하고 영원한 커뮤니티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쉽지 않아 쇼핑 횟수가 줄면서 냉장고가 점점 비어 가는 덕에 오랫동안 선택받지 못한 채, 냉동고 구석에 꽁꽁 언 고기 한 덩이가 보였다. 아무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야채 통조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부엌 제일 하단 수납공간 구석 손 닿지 않는 곳에서 파스타와 토마토소스를 찾아냈다. 온라인 수업을 받느라 집에 있는 아이들 점심을 만들어 주었다. 식후에 작은 아이가 방문을 노크했다. “Thank you, daddy. It’s VERY good!” 새로운 job을 구하지 못해 오랫동안 방구석 신세를 지고 있는 어두운 마음속 깊이까지 밝은 햇살이 비쳤다.
글 주진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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