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매일 매일 육아 전쟁터로 나가는 ‘전사’가 되어야만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래, 그깟 드라마, 그깟 여유쯤이야.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아주 많이 사랑해 주자.’ 나의 애틋한 첫사랑 은서, 그리고 숨소리조차 귀여운 둘째 은하. 이렇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 인생의 첫 경험,
미국에서 아기 낳기
아, 난 어째서 또 다시 이 선택을 한 것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에피듀럴이 듣질 않아 진통은 계속 느껴지고 의사 선생님은 자꾸 어떠냐고 물어보는데 다리도 저리고, 정말 너무너무 아프기만 하다고! 한국에서 큰 아이를 낳은 터라 미국에서의 산부인과 시스템에 적응하기까지 또 영어로 진료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꽤나 불편한 10개월을 보내고, 난 그 임신 기간보다 더 힘든 진통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그리고 다리가 저리다는 걸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잊은 당황함에….
다행히 무통 천국을 누리며 난 웃으며 둘째 아이, 은하를 맞이했다. 내가 첫째를 또 낳았구나 싶게 은하는 큰 아이의 첫 모습과 꼭 닮았다. 너무 예뻤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산후 조리를 위해 미국에 오시겠다는 걸 마다하고 우리끼리 하겠다 큰 소리 쳤지만, 겁이 났다. 오죽하면 미국한인 주부 사이트에 “혼자서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나요?” 라는 글을 올렸을까?
얼굴조차 모르는 많은 ‘엄마’들이 내 처지를 정말 안타깝게 여기며 자기네 집 근처면 첫째 아이를 돌봐주고 싶다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난 홀로 새벽에 산부인과에 입원, 진통을 견디다, 아이를 낳을 무렵, 헐레벌떡 병실로 달려온 신랑과 함께 둘째를 낳았다. 걱정과는 달리 마음이 그리 힘들지 않아 할만 했고, 그렇게 난 해 냈다.
내가 둘째를 낳은 병원에서는 어린이 들은 오버 나잇이 허용되지 않았고, 모자 동실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째를 낳은 첫 날부터 홀로 아이를 돌보며 밤을 지새웠다. 잠은 왔지만, 아프진 않았다. 너무 예뻐서? 아니. 매 시간 간호사들이 챙겨주는 모트린 덕분에! 끊임없이 진통제를 주는 것 또한 미국에서 느낀 한가지 문화 충격이었다
매일 아침 은서는 아빠 손을 잡고 병원에 와서 나와 시간을 보냈다. 은서는 병원 침대의 온갖 버튼을 섭렵했고 병실 바닥을 우리 집 거실처럼 누비며 즐거워했다. 또 신랑은 부실한 병원 밥을 대신할 음식들을 매일 챙겨 왔다. 워낙 양식을 좋아하는 터라 병원밥이 싫진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신랑이 가져오는 ‘사랑’의 미역국은 내겐 최고의 산후 조리였다.
병실에 있으면 시간마다 산모와 신생아의 상태를 체크해 주고 또 아기의 기저귀와 분유가 떨어질 새라 바로 바로 챙겨 주었다. 날 돌봐주던 흑인 간호사는 밤새 홀로 아기를 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종이 가방 한 가득 아기 용품을 챙겨주며, “다음에 올 간호사한테, 아기 용품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세요.” 라며 눈을 찡긋거리기도 했다. 정말 최고!
그렇게 난 아기 용품을 한 가득 챙겨, 2박 3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드디어 두 아이의 ‘리얼 생생’ 육아가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은 내게 음식의 맛을 즐기며 밥을 먹을 잠시를, 밤새 통잠을 잘 기회를, 드라마 한 편 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난 매일 매일 육아 전쟁터로 나가는 ‘전사’가 되어야만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래, 그깟 드라마, 그깟 여유쯤이야.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아주 많이 사랑해 주자.’ 나의 애틋한 첫사랑 은서, 그리고 숨소리조차 귀여운 둘째 은하. 이렇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아!”, “응애!”
아! 내 두 아이가 부른다. 엄마 전사 출동! 나의 예쁜 새끼들 사랑해 주러!
글 이현진_Mom Reporter
실험실에서 20대를 보내고 지금은 예쁜 아내, 좋은 엄마. 그리고 멋진 ‘나’를 찾고자 소망하는 미씨. 요리, 뜨개질을 즐기며 아침 일찍 ‘나홀로’ 커피 타임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