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이 보내온 초대장

소교의 영국 시골살이 / 봄편

'어느 봄날, 일생에 한 번 받기도 어렵다는 영국 여왕의 가든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다.

“닥터 조지가 내년 여왕 가든파티에 우리 부부를 추천할 거래.”

듬성듬성 올라온 노랑 버터컵 잡초를 뽑고 있는데 불쑥 남편이 말했다. 여왕의 가든파티? 아직 확실치 않다 해서 잊고 지냈다. 이듬 해 봄, 범상치 않은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두툼한 질감이 늘 받는 고지서와 달랐다. 봉투 한쪽 구석에 찍힌 왕관 스탬프-. 봉투를 열어보니 나와 남편 이 름이 적힌 카드와 찾아오는 방법 및 드레스코드 등이 적힌 안내서가 들어있었다. 버킹엄 궁에 서 온 초대장!

티파티 당일, 들뜬 마음으로 단장을 하고 런던 행 기차를 탔다. 이전 행사 사진을 보니,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 격식 있게 차려 입은 어르신들이 많았다. 훈장이 주렁주렁 달 린 제복, 반짝이는 드레스, 화려한 모자, 굽 높은 구두 일색이었다. 내 발에는 자줏빛 크록스 신발이 끼워져 있었다. 정원에서 밭일할 때 편하게 신으라고 엄마가 사 준 단화 였다. 남편의 팥 죽색 정장에 어울릴 만한 심플한 드레스에 나름 맞춘 것이었다. 신발에 묻은 진흙을 물 티슈로 닦아내며 ‘고무신을 신고 버킹엄 궁에 갈 줄이야’ 하는 사이 기차가 런던 유스턴 역에 도착했다.

‘시골쥐’가 된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지상으로 올라오니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축축하고 어 두운 회색 런던 그 자체였다. 웨일스 시골의 푸른 잔디와 화창한 봄날을 뒤로하고 오면서 변화무쌍한 영국 날씨를 깜빡 잊은 것이다. 급히 가게에서 우 산을 샀다. 버킹엄 성문 앞으로 다가가자 기다란 줄이 보였 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멋낸 사람들이 단체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검은 철창이 뾰족하게 솟은 성문 앞에 서 초대장 검열을 받고 화려한 금장 액자와 장식들로 꾸며 진 성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슬 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넓은 잔디밭 한쪽으로 길게 흰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앙 증맞은 디저트들과 홍차를 서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 앙 뒤편 천막에 ‘로열 티 텐트(ROYAL TEA TENT)라는 사인이 세워져 있었다. 귀족이 아니면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줄 긋기 같았다.

남편과 나는 접시마다 예쁘게 놓인 케이크와 샌드위치, 제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디저트 몇 가지를 고르고 홍차 한잔 을 받아 텐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여왕이 즐겨 먹는다는, 왕관 무늬가 찍힌 초콜릿 무스 케이크 맛이 제일 궁금했다. 입에 쏙 넣으니 부드러운 크림 속에서 예상치 못한 과일 향 이 퍼졌다. 이런 맛난 디저트를 매일 먹고 사는 여왕이 새삼 부러웠다. 잎을 충분히 우려내지 않은 채 우유를 부어 멀건 홍차를 한 모금 마시자 온 몸에 후끈, 온기가 퍼지면서 닭살 이 돋았다. 부슬비도 내리고 으스스한 날이라 그런지 맹탕 같은 차 한 잔이 뜨끈한 국물 한 사발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형편없이 묽은 홍차를 받아 들고, 홍차에 관해서는 자비 없는 영국 시누이가 이 차를 보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라며 남편과 나는 앞다투어 시누이 흉내를 냈다.
색색의 디저트 중에서도 여왕이 즐겨 먹는다는, 앙증맞은 왕관 무늬가 찍힌 초콜릿 무스 케이크 맛이 제일 궁금했다.
좀 더 전통적인 정장을 입을까 하다가 고민 끝에 남편은 팥죽색 정장을 골랐다. 지난 번 산 고급 맞춤 우산을 집에 모셔 두고 중요한 날 싸구려 장우산을 들게 되어 못내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