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 are the essence of the star that will guide us
극재(克哉)정점식 화백과
그의 딸 에리카 정, 3lab 화장품 창업자
괜찮은 10월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유하기에 적당한 계절. 무엇을 향해 숨이 턱에 차도록 이리 내처 달려왔을까? 60년을 훌쩍 살고 난 지금에서야 나는 잠시 뒤돌아본다. 두텁게 쌓인 그 세월을 한겹씩 걷어내고 나니, 마치 낡고 손때묻은 일기장 같은 옛시절을 만난다. 오늘은 잠시 그때 기억에 기대어보려 한다. 아버지, 내 아버지. 피카소와 클레를 좋아하셨고, 늘 절제된 언어로 기품을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 평생을 화가이자 교수로 사셨고 한 인간으로써의 삶을 충일하게 완성하셨던 아름다운 분. 어디선가 ‘영주야’
‘인생에 쓸데없는 짓은 없다.’
고급브랜드 화장품 3 Lab의 창업자 에리카 정씨와의 인터뷰 약속이 있는 날이다. 모닝 커피 한잔 마실 틈도 없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맨하탄으로 달려나갔다. 52가 미드타운의 한 고급 아파트 라운지에서 에리카 정, 그녀를 만났다. 슬림하고 아담한 체구에 흐트러짐 없는 깔끔한 인상과 세련된 외양이 전형적인 차도녀의 이미지였다. ‘화장품 업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공연한 타이틀이 아니었단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무렵, 사람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 소탈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명함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던 기자에게 수인사를 청했다. 마치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색하던 그녀는 그 흔한 수식어 한자락 없이, 그럴싸한 자화자찬 한 줄없이 담백하고 빠른 어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한국 기업의 뉴욕 지사장으로 10년을 살았고, 결혼 후 남편(David Jung)과 함께 화장품 가게를 오픈해서 기반을 다졌고 다시 제조업으로 확장시켰으며, 3lab 화장품을 론칭하고 백화점에 입점해서 현재는 연 매출 4000만 달러의 규모로 키웠다.”
30년이 넘는 그 긴 시간을 그녀는 이렇게 단 한줄의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겠지만 그게 그리 간단한 사실만은 아닐 뿐더러 그녀의 인터뷰는 그 나름의 큰 의미가 있었다. 화장품 업계에는 그 제품을 탄생시킨 창업자가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경우도 드물고, 100% 오너쉽을 가진 경우도 흔치 않기 때문에 3lab이라는 브랜드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며, 기업의 철학을 창업자의 육성을 통해 듣는다는 것이 인터뷰를 하는 중요한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비즈니스 스토리는 그야말로 “별의 별 일이 다 많았다”로 시작된다. 남편과 함께 뉴저지에 ‘모나스’ 화장품 가게를 오픈했고, 비즈니스는 성공적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뉴욕과 LA에 ‘코스메틱 월드’를 열었다. 그러다 남편, David Jung 대표가 고급화장품 한국 총판권을 따내 한국으로 사업터를 옮겼는데 마침 IMF가 터져 큰 손실을 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온라인 화장품 쇼핑몰인 ‘마이디바닷컴’을 론칭하고 본격적으로 재기했다. 이 온라인 쇼핑몰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체 화장품 브랜드 론칭에 심혈을 기우려 2003년에 3lab을 출시하게 되었다. 3lab화장품은 출시 당시 판매가가100-400불 정도의 고가제품이었는데, 신생 회사로써는 적잖은 위험부담을 안고 출발한 셈이다. 그러나 어줍잖은 제품에 비싼 광고를 적당히 버무려 장사나 하겠다는 얇팍한 상술은 완벽주의에 가까운 그녀의 성격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화장품을 만들고,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다름아닌 그녀의 자존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론칭 후 급성장을 거듭한 3lab은 2005년 화장품 제조업체인 ‘잉글우드랩’을 설립했고 뉴욕 백화점 입점에 성공했으며, Barney’s New York 전 매장과 Nordstrom 수십개 매장도 확보했다. 이후, 2006에는 독일에서 부터 시작해서, 영국, 홍콩, 러시아, 듀바이 등 현재 18개국으로 지경을 넓혔고, 현재는 더 많은 곳으로의 진출을 꽤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인터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비즈니스 우먼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별의 별 일 다 겪었고, 온갖 일이 다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숱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마음에 평정심을 얻는 공부를 하게되었으니 그들은 다 나의 스승이며, 온갖 일 겪는 동안 인생에 쓸데없는 짓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러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 쓸데없을 것 같은 일들이 필연처럼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생의 단 한번의 인연’
짧은 비즈니스 스토리에 비해 그녀는 시종 한 사람에 관한 긴 이야기 들려주었다. 늘 가까이 계셔서 존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분, 정갈한 차림, 해박한 지식에 그림과 예술에 대한 성찰이 깊으셨던 분, 윗옷 주머니에 작은 향수병을 지니고 다니며 늙은이 냄새는 안되다셨던 분, 자신을 ”나, 정이요” 라고 낮출만큼 겸손을 아셨고 그럼에도 결코 기품을 잃지 않으셨던 분, 그는 한국 추상회화의 거목 극재(克哉) 정점식 화가였고,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8천겁의 인연이 모여 부모와 자식이 된다지만 이 생에서 아버지와의 인연은 일기일회인 것을. 그리워도 마음에 품을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다만 아버지가 남긴 것을 딸이 거두어 예술을 향한 아버지의 지고한 뜻을 온전히 지켜야할 때임을 그녀는 요즘 자주 깨닫는다고 했다.
현대미술의 거장 극재 정점식 화백
지난해 가을, 극재 정점식 화백(1917년-2009년)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그가 평생 몸담았던 계명대학교 극재 미술관에서 열렸다. 선생은 경북 성주에서 출생해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후, 계성학교와 계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평생 후학을 기르며 화필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또한 한국 추상화단의 근간을 이루어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분이기도 하다. 시인을 꿈꾸었을 정도로 문학도였던 극재 선생은 당시 김기림, 박목월과 자주 어울리며 보들레의 싯귀를 암송하기를 좋아했고,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화가의 수적, 아트로포스의 가위’ 등 여러 권의 예술서적을 집필했다.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술 작품 못지않게 그의 현학의 문장을 기억하며 선생께서 남긴 지성적 예술가상의 실현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작업은 찾는 게 아니라 마주치는 것, 무의식에 숨어있다 우연히 현현한 것” 정점식의 ‘안개 속의 언어’ 중에서
일찌기 서구의 추상미술에 경도된 후, 동서양의 화법을 버무려 작가 고유의 화필로 빚어낸 그의 작품 속에는 작가의 지성적 고찰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뛰어난 교육자이자 한국 추상화단의 큰 별이셨던 극재 선생은 타계하셨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정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이 그의 위대한 삶과 유산을 지키기 위해 꾸준한 연구와 기념회, 그리고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흔적을 담은 작은 갤러리
뉴욕 업스테이트에 있는 에리카 정 대표의 주말 하우스에는 인터넷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극재 선생의 작품들 여러 점이 걸려있다. 그 곳은 아버지를 위해 딸이 마련한 갤러리라 해도 좋을성 싶다. 아버지 곁에 사는 동안 그는 그저 그녀의 아버지였지, 한 예술가로 혹은 뛰어난 인간으로써의 그 가치를 그녀는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고 한다. 오빠, 윤(한국 외국어대학 교수), 재윤(전 경성대 교수)씨는 학자로 여전히 교육계에 몸담고 있기에 아버지의 정신을 기리는 일은 언니 명주씨와 그녀의 몫이라 여기는 것도 당연해보인다.
자의식과 자존심이 강했던 어린 시절, 말 수가 적으셨던 아버지께서 그녀를 향해 건네신 한 마디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영주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내적 수양을 통해 더 나은 인격체로 성장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씀 한 마디가 그녀의 내적 윤리의 기반이 되었고, 늘 자신을 성찰하는 삶의 본질이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요사이 자주 느낀다고 말한다.
You are, the essence of the star that will guide us
극재 선생의 작품을 감상하고 돌아오면서 작품에 담긴 작가의 예술적 캐릭터와 에리카 정 대표와는 어느 지점쯤에서 교차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버지와 딸, 모르긴 해도 서로 맞닿아있는 예술적 지점이 분명 있을테니 말이다. 타계하기 전 선생이 병석에 누웠을 때 지인이 문안하여 물었다고 한다. “링거와 호스를 제거하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무얼 가장 먼저 해보고 싶소?” 극재 선생은 “방천시장을 구경하며 손으로 스케치하고 싶다”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도 예술을 향한 뜨거움을 거둘 수 없었던 작가의 위대한 정신이 한 생을 열심히 살았고, 언제나 자기 앞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스스로를 성찰하고 다듬어왔던 정대표의 지난한 노력과 맞닿아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지난해 3lab화장품은 연 매출 4000만불을 달성했다. 성공한 여성 사업가 에리카 정, 그녀는 최근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며 그들의 예술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사회로 눈과 마음을 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껏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주변을 돌아보며 경제적 환원 이 외에도 정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메디테이션을 통한 위로를 나누고 싶다고도 했다. 그저 한두번 마음내키는 선행이 아니라 보다 체계를 갖춘 환원을 구상하고 있단다. 예술가의 고독한 삶을 통해 얻어진 예술 작품은 작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상 모두의 것이라던 아버지의 마음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목이다.
“예술은 작가 개인적인 작업에서 시종(始終)되지만 그 목적은 개인의 존재를 넘어 사회나 인간을 향해 방사하는 메세지라야 한다” 정점식 화집, 2008년, p77



기자의 우문(愚問), 그녀의 현답(賢答)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자는 인터뷰 막바지에 전근대적 우문 하나를 던졌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물음을 정형화된 몇마디 언어의 틀에 가두는 것이 다소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러는 그런 단순하고 직설적인 질문에 돌아오는 즉답이야 말로 그녀의 평소 사유가 깊이 반영되어 있으리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수동적 운명에 순응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다.”
그리고 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는 ‘의리, 집중, 책임감’이라고 덧붙였다. 3lab 브랜드로 화장품 업계에 당당히 자리매김한 그녀의 비즈니스적 능력은 차치하고라도 그녀가 인생에서 붙들고 있는 그 세가지는 지금의 에리카 정을 만든 핵심 키워드다. 사람과의 인연을 중히 여기는 의리와, 자신의 일에 에너지를 소진시킬 만큼의 집중, 그리고 그 흔한 광고 하나없이 오로지 상품의 품질로 승부를 이룬 그 토대에는 그녀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을 책임감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대를 불문하고 잔잔한 경종이 되는 대목이다.
운명적 이치에 순응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녀의 삶도 이제 해질녘에 접어들었다. 그 사실 앞에 숙연함을 감출 수 없으며, 남은 시간은 이타적 삶에 매진하고 싶다는 그녀는 아버지가 남기신 예술적 가치를 마음을 다해 지키며,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각오도 전했다. 비록 평생을 사업가로 살아왔지만, 늘 선을 추구하며 마음을 닦는 그녀의 내면에는 한국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 극재 정점식 선생의 심미적 Gene 이 잔잔히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