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
아트디렉터 다이앤 최(Diane Choi)
어느 봄날,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바비’(Barbie), ‘베렌스타인 베어’(The Berenstain Bear), ‘마인크래프트’(Minecraft) 등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알록달록한 동화책을 한가득 안고 온 그녀를 만났다.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영문 출판사 ‘펭귄 랜덤 하우스’(Penguin Random House)에서 21년째 근무하고 있는, 아동 도서 부서의 아트 디렉터, 다이앤 최(Diane Choi)이다. 백인 비율이 약 80%를 차지하는 출판사에서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디자이너로 인정받아온 그녀의 일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책의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 아트 디렉터
“안녕하세요. 출판사 ‘펭귄 랜덤 하우스’ 에서 아동 도서를 맡고 있는 아트 디렉터 다이앤 최입니다. 아트 디렉터는 에디터와 함께 트렌드에 맞춰 아이들용 도서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을 하는데요. 책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글과 그림이 잘 어우러지도록 디자인하고, 머리 속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합니다. 필요한 경우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를 선정하기도 하고요.”
팬데믹, 엘모와 오스카에게 마스크를 씌우다
지난 20여년간 그녀가 작업한 책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바비’는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해 ‘바비’의 판권을 보유한 완구 회사 마텔(Mattel)로부터 ‘Partner of the year’ 상을 받기도 했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엘모(Elmo)와 오스카(Oscar)에게 마스크를 씌운 그림책 ‘Even Grouches Wear Masks!’를 선보였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획한 이 책은 큰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빠른 실행력이 돋보이는 결과물이었다. 요즘은 한국인 캐릭터 ‘지영’이가 등장하는 세서미 스트리트 시리즈의 책을 작업하고 있다. “회사에서 ‘지영’이가 나오는 책을 만든다길래 제가 하겠다고 나섰어요. 쿠키 몬스터(Cookie Monster)가 할머니가 만들어준 떡볶이를 먹는 장면도 들어가는데요. 일러스트레이터가 불을 뿜듯 맵게 표현했길래, 그 정도는 아니다 ‘호~~’ 정도로 바꿔달라고 했어요(웃음).”
“가끔 반스 앤 노블에서 제가 만든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다가가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뿌듯하고 행복해요. 아이들에게 사랑 받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어요.”
마감은 칼같이 지키는 해결사
‘On time에 일을 끝내는 사람’ 주변 동료들은 그녀를 이렇게 평가한다. 신선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능력을 인정 받고 있는 그녀는 마감이 임박하거나 급한 일이 생긴 동료들에게 1순위 해결사다. 2008에는 랜덤 하우스 아동 도서 부서의 올해의 임직원상(Random House Children’s Books Whoo Hoo Award 2008)을 받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성실하잖아요. 열심히 일하고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일을 끝내는 것이 책임감이라 생각합니다.”
80%가 백인인 대형 출판사의 유리 천장을 뚫다
“출판 업계는 백인 비율이 유난히 높아요. 우리 회사의 경우 약 80%가 백인인 것 같아요. 미국 내 유명 출판사는 대부분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어요. 출판 쪽 취업 시장은 크지만, 한인을 비롯한 아시안에게 유난히 문턱이 높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근무 태도가 아주 좋잖아요. 더욱 많은 한인이 문을 두드리시면 좋겠어요. 앞으로 실력 있는 한인 디자이너들이 보다 많이 채용될 수 있도록 힘이 되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아트 디렉터 다이안 최는 Pratt Institute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처음부터 책 만드는 일을 꿈꿨던 건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는 향수, 유리병 같은 상품 패키지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처음 인턴십을 했던 회사가 PSP(Professional Sports Publications)였습니다. MLB, NBA, NHL 등 모든 스포츠 관련 매거진과 프로덕트를 제작하는 회사였어요. 제가 작업한 게 책으로 나오고 제 이름이 새겨지는 걸 보며,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어요. 이후 ‘GQ’에서 나온 새로운 매거진 일도 했는데요. 매거진 쪽 일은 끊임없이 마감에 쫓기는 격무가 이어지다 보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프리랜서로 잠시 전향했다가, 제가 좋아해서 아이들이 잘 때 늘 읽어주던 책을 발간하는 출판사의 디자이너 구인 소식에 응해 다시 출판사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21년이 흘렀네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하잖아요. 지난 21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었고, 제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잘돼서 인정도 받고, 회사도 계속 성장하고 있어서 참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장 속도가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
“저는 8살 터울의 두 아들이 있어요. 큰아들 제시는 23살, 둘째 아들 조슈아는 15살인데요. 이제는 아이들이 많이 컸지만, 아이 둘을 키우면서 일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저희 신랑은 출장이 잦아 육아의 많은 부분을 제가 감당해야 했거든요. 특히, 첫째 아들은 성장 속도가 조금 다른 아이예요. 초등학교 2학년 때 ADHD 진단을 받았는데, 수업 중 주의가 산만하다거나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해 학교로부터 전화도 많이 받고 종종 불려가기도 했어요. 그 때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Mom, Did anyone call you from school?”라고 물어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이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싶어요. “전화 오면 어때? 오늘이 조금 Bad day였나 보다. 힘든 일이 있었어?” 라고 물어보는 엄마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제발 학교에서 엄마한테 전화 안 오게 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아이한테 줬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아이가 더 눈치 보고, 불안해서 학교에서 잘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이가 얼마나 잘하려고 노력했는지 알아주고, 아이 입장에 서 더 생각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아트 디렉터 다이안 최는 엄마로서 본인이 겪은 성장통과 경험을 기꺼이 나누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한국 엄마들은 ‘힘든 건 혼자 삭혀야 하고, 울지 말아야 한다’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아이에게 문제가 있으면 주변에 이야기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내가 잘못해서 아이가 이렇게 됐다’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절대로 엄마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가 아니라, 아이의 기질이 다른 거라는 걸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이런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매일 매일 근심 걱정에 싸여 다른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른다는 외로움이 있거든요. 자기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거, 여러 다른 문제로 고민하는 엄마들이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그녀는 아시안 부모의 경우 학교에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며, 아이가 잘못한 부분은 정확히 사과해야 하지만 부모가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영어가 불편한 아시안 이민자 부모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학교에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 엄마들을 위해서는 제가 통역을 자처해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내가 겪은 어려움과 힘든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을 주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 번의 이사 – 환경이 아이를 바꿨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희는 첫째 아이에게 맞는 학교를 찾으려고 퀸즈에서 롱아일랜드로 세 번이나 이사하며 학교를 옮겼어요. 좋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건 너무 중요한 일이었어요. 문제아로 낙인 찍혀 아이의 행동을 지적하기만 했던 환경에서
아이의 잠재력을 높이 사고 어떻게 해야 아이로부터 더 좋은 행동과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지에 포커스를 맞추는 학교에 오니 아이가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지금은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홈디포에서 일도 하고 있답니다. 물론 다른 아이처럼 한 학기에 많은 학점을 듣고 있지는 않아요. 자기 속도에 맞게 천천히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아무래도 조바심이 생기기 마련인데요.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고, 아이를 바라볼 때 엄마의 불안감을 걷어 내세요. 너의 존재만으로 엄마는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눈빛을 주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를 믿어주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아이는 너무나 달라진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를 응원합니다”
“이민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기 일도 잘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어머니 날을 맞이해 모든 엄마가 잘하고 있다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다 보니 시집이나 소설 한 권을 읽어 본 게 언젠가 싶은데요. 책 한 권이 나오기 위해 참 많은 사람들이 애쓴다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봄에, 스스로 시간을 내서 읽고 싶었던 책도 읽으며 책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