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주워 온 말들

황은미 변호사

‘…아버지는…(중략)…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 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 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본문 249p) – 정지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여동생, 남동생, 오빠, 누나이며, 연인, 아내, 남편이고, 친구이며, 다른 많은 무엇이다.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도 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유 일하고 다양한 “나”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가 누군가의 애틋한 연인이고, 존경하는 스 승이며, 둘도 없는 친구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왠지 어색한 일이다. 나의 삶 내내 “나의 아버지”였기에. 아버지였기에 우리는 모두 적당히 무심했기에. 우리의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또 온 마음으로 품어주셨기 에. 그렇게, 우리는 덜 표현하고, 덜 궁금해하고 그래서 결국 당신을 잘 모르게 된 건 아닐까? 당신의 장례 식장에 찾아온 낯선 타인들의 기억 속에 조각처럼 남아있는 친구, 은인, 스승, 연인이었던 아버지를 마주 했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당신이 그립지 않을 수 있을까?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 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 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 불렀다.’

본문 181p

나이 든 아버지의 하루는 단조롭지만 분주하다. 호흡기 장애가 있는 아버지는 치열하게 숨을 쉬어내야 하 고, 누워만 있기에 소화 장애가 생긴 그는 음식을 열심히 꼭꼭 씹어야 한다. 규칙적으로 화장실을 다녀오 는 것도 중요한 일상이다. 잘 자고, 잘 먹는 일이 전부가 된 단조로운 하루는 생사를 위한 기본적인 행위들 로 분주하다 못해 치열하다. 나는 매일매일 아빠의 안부를 묻는다. 아빠의 단조롭지만, 분주한 하루가 어 제와 다르지 않게 잘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안.부.만. 물었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신념, 철 학, 이념’ 등 생사와 상관없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20대와 30대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의 권리 수호를 외치며 길거리 농성을 자처하고, 3당 합당의 부당함에 열변을 토하던 그런 때. 아빠의 숨소리가 편안한 어떤 날이 되면, 잊지 않고 당신의 신념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물어야겠다. 당신의 젊은 날, 그때의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냐고 여쭙고, 가만가만 눈도 마주쳐 보리라.

‘가느스름 뜬 눈 사이로 불빛을 등진 채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나타났다. 짐이 어찌나 무거운지 어머니 걸음이 비틀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얼른 내려놓고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나를 버리고 어머니에게 달려간 아버지가 서운해서 나는 목청 놓아 울었다.

목에 걸린 누룽지를 뱉어내며 나는 섧게도 울었다. 어머니가 등을 내밀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결국 한 손에 어머니 짐을 받아 든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등을 자장가

삼아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한 손으로 나를 받치기 힘들었는지

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치켜올리는 통에 잠시 잠에서 깼다.

“딴 집 애기들은 엄마가 젤 좋다는디 우리 아리는 당신이 최곤갑소이.”

“하모. 우리 아리한테는 나가 젤이제. 당신보담 나가 젤이여.”

“아이고 좋겄소. 당신이 일등이라.”

“왜 나가 일등인 중 안가?”

“당신이 만날 놀아중게 글지다.”

“아니여. 나가 맹근 누룽지가 자네 것보담 시배는 크거든.

우리 아리가 누룽지라면 환장을 허잖애.”

“아닌디, 누룽지 안 줘도 아빠가 최곤디”, 잠결에 중얼거렸고

아버지는 “하하”, 밤하늘이 시끌적하게 웃어젖혔다.

사무치게, 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중략)…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문 230~231p

턱에 털이 가득하던 아버지의 별명은 털보였다. 털보 아버지가 나의 볼에 뽀뽀를 해댈 때면, 여린 볼이 금세 빨개질 정도로 따가웠다. 그래도 좋았다. 좋은데 아프니 울음도 났다. 울면서도 아빠 곁에 바짝 붙어있는 어린 딸아이가 귀여웠을게다. 그런 나를 보며 껄껄 웃어 젖히는 어른들의 모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빠와의 스킨십이 어색했다. 어색하니 피하고, 피하니 더 어색해졌고, 나는 무뚝뚝한 딸이 되었다. 무뚝뚝해졌다고 당신이 그립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제는 당신을 편안하게 안아드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어떤 날, 당신의 숨쉬기가 편안한 어떤 날, 당신의 거친 털 때문에 뽀뽀를 100번 하고 싶었던 것을 10번밖에 못 했다고, 그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나이 든 아빠는 여전히 털보다. 단지, 억세던 검은 털이 첫눈처럼 새하얗게 변했을 뿐이다. 더 이상 억세지 않아 따갑지도 않다. 그러니, 이제는 웃으면서 뽀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해야겠다. 타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당신은 이제 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당신을 다시 만나는 노력을 해야겠다. 어떻게 해도, 난 당신이 그리울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