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재무분석가
신순규씨와 그 가족이 사는 법
신(新)가족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는 전통적 가정이 해체되고 소가족, 핵가족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상이 공존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소위 가슴으로 낳는다는 입양이 한국내에서만 이미 20만명을 넘어섰고, 결혼과 혈연이 지배하던 가족의 개념이 남도 같이 살면 가족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 시민사회의 핵가족제도를 넘어 이제는 보다 효율적인 사회공동체, 즉 공동거주가족이나 수양가족, 혹은 후원가족 등의 다양한 기초 단위의 가족모델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바드와 MIT 를 졸업하고 현재 Brown Brothers Harriman의 공인재무분석가(CFA)로 일하고 있는 신순규씨는 이러한 현대적 신개념의 가족관계를 이미 오래 전에 체험했고, 현재도 그런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고있는 사람이다. 맘앤아이는 가족에 대한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11월을 맞아 신순규씨와 그 가족이 사는법을 인터뷰로 담았다.
한인 이민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제법 유명세를 탔던 신순규씨는 월스트리의 중견 재무분석가이자, 매일경제 칼럼니스트 그리고 2014년 도서출판 판미동을 통해 발표한 에세이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로 베스트 셀러 작가의 대열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당시 책이 출간되자마자 SBS를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는데, 그의 책은 시각장애인인 그가3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점자(Braille)컴퓨터를 이용해 완성한 책으로, 자신의 삶과 인생의 참가치에 대한 통찰과 성찰을 담고있다.
신순규씨는 9살 나이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 전까지는 매일같이 골목을 뛰어다니던 동네 개구장이였지만, 녹내장과 망막박리를 막기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술을 받아야 했고, 잦은 수술이 희망보다 고통으로 느껴질 무렵 그는 소위 맹아가 되었다. 당시 기분을 기억할 수 있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더 이상 수술을 받지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무척 기뻤다고 한다.
맹아학교 입학 후 어릴 때부터 배웠던 피아노 덕택에 학교에서 합창단 반주를 맡으며 미국순회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의 연주를 본 뉴저지 오버부룩(Overbrook School) 학교의 제안으로 열다섯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된다. 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금 일찍 미국에 입국해 체류하는 동안 그는 Ormesher씨 부부를 만났고, 그들은 그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립할 때까지 그의 수양부모가 되어 신씨가 한국의 가족들과 떨어져 미국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그를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신씨는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서 학생회장에 뽑힐 정도로 리더쉽을 발휘했고, 특히 하바드, 프린스턴, MIT, 유펜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 동시 합격은 물론, 하바드와 유펜에서는 전국장학생과 벤자민 프랭클린 장학생에 뽑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이는 모두가 다 오머셔 부부의 헌신과 사랑때문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시각장애인 최초의 의사가 되고 싶었던 신씨는 장애인은 의사가 될 수 없는 법적 제한 때문에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하바드에서 심리학, MI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조직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당시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의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첫 성공사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JP모건에 들어가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2003년 시각장애인으로써는 세계 최초로 금융분야의 최종 자격증인 CFA 를 취득하고 현재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에서 재무분석가로 일하고 있다.
그가 실명을 했을 당시 한국사회 분위기는 시각장애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는 편견과 차별이 만연해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재수없는 존재라고 여겼거든요. 특별히 저는 택시타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택시기사들은 내가 승차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특히 아침부터 나같은 장애인을 태우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고 믿었던 것 같았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의 집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액운을 떨쳐내야한다며 소금을 뿌려대기도 했죠.”
신씨는 그가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지금쯤 기초생활 수급이나 받고, 국가가 주는 장애인 혜택으로 살았거나, 운이 좋았다면 안마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처지의 자신을 지금의 삶으로 이끌어 준 분들은 미국에서 자신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주고 자기가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Dave Ormesher 씨와 Mary Ormesher 부부의 헌신과 사랑 때문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도 안다’는 말이 있듯, 장애인으로서 한국사회의 미성숙에 직면했던 경험을 가진 그는 자신의 아픔과 궤를 같이하는 또 다른 집단과 마주했다. 그들은 바로 어린이 보호시설에서 사는 아이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모두가 고아로, 사실 조실부모한 예전의 고아들과는 달리 부모 중 한명이, 또는 심지어 양부모가 다 생존해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들을 고아라 부르기가 애매한 아이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가난이나, 이혼과 재혼, 또 여러 가지 부득이한 이유로 아이들을 보호기관에 맡길 수 밖에 없어 부모로서의 법적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보호소 아이들에게는 의식주를 포함해 여러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또 예체능과 같은 특별 교육이 제공되고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불행히도 그런 모든 혜택은 아이들이 보호소를 떠남과 동시에 끝이 난다. 관례상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다수 아이들은 보호기관을 떠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회로 나온 이 아이들을 과거 보호소 시절보다 더욱 처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유는 교육과 직업, 고용의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무엇보다 함께할 공동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순규씨는 그들이 오히려 시각장애인들 보다 훨씬 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고 그들을 기다리는 부모가 없으며, 사회의 무참한 차별로부터 고통스러워할 때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손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신뢰받는 인간이 되는지, 존경받는 남성과 여성이 되는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생산적이고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또 어떻게 남편과 아내를 사랑해야하는지, 어떻게 성숙한 엄마와 아빠가 되는지를 가르쳐 줄 부모가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20,000명 가량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호시설로 보내진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신순규씨는 지난 2008년, YANA (You Are Not Alone)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10년 째 건강하게 단체를 이끌어오고 있으며, 지난 2014년 4월, YANA 유학프로그램의 첫 수혜자로 13살 예진이를 미국에 데려와 한 가족을 이루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있다. 신씨 자신은 한국의 부모, 또 미국의 양부모와 함께 두 개의 가정 안에서 엄청난 혜택을 누려왔는데, 그 아이들은 단 하나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며, 자신이 진 사랑의 빚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 오랜 바램이자 소명이었다며 YANA의 취지를 밝혔다.
“ 예진이가 저희와 함께 가정을 이룬지 만 4년이 지났어요. 우리딸이 되어준 예진이는 13살난 제 아들 데이빗과 전혀 다를바 없는 우리부부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데이빗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듯이 예진이 또한 잘 양육하기를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진이가 글쓰기에 재능이 있고 최근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큰 상을 받았다며 인터뷰 내내 자랑을 늘어놓는 그는 여느 아빠와 다름없는 딸바보다. 예진이가 법적으로 입양이 불가능한 나이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면 그나마 보호자의 임무도 사라지게 되지만, 그때까지라도 예진이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돌보는 것이 그와 그의 가족이 예진이에게 나눌 수 있는 최선임을 그는 잘 알고있다. 현재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에 이은 두번째 책 출간준비를 하고 있는 그는 YANA를 통한 모든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한가지 방편이며,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덧붙였다.
남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덜 사랑하기
신순규씨의 아내 그레이스씨는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밝고 유쾌하고 또 좋은 기운을 느끼게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시절의 그녀는 말이 없고 소극적이었으며 사회성이 부족해 늘 할머니 치마폭에서 지낸 아이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났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활동적이며, 자존감이 높고 밝은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우연한 인연이 한 사람의 성격과 삶을 바꿔놓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있기에,예기치않게 예진이의 엄마로 살아가게 된 자신에 대해 늘 조심스럽고 두렵다.
모든 인연이 다 아름답듯 신순규씨와 그레이스씨의 인연도 특별하고 귀하다. 그들은 밀알이라는 장애인 선교단체에서 봉사를 하면서 만나 교제하게 되었고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를 좋아하던 두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10년 가까이 아이를 갖지못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10년만에 아들 데이빗을 얻었고 아이와 더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남편 신순규씨는 자신이 대가없이 받았던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고싶다는 오랜 소망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의 꿈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YANA였고, 그리고 마침내 예진이가 그들의 가족이 되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예진이가 비자를 받는 날까지 저는 비자가 허락되지 않기를 기도했어요. 이 일이 남편의 간절한 바램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 나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동의는 했지만 너무나도 두렵고 겁이 났거든요.”
예진이가 미국으로 오고 늘 안정적이던 일상에 변화가 생기면서 그레이스씨 마음에는 적잖은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십년 넘게 아이가 익숙하게 젖어있던 고아원 생활의 좋지못한 습관이나 건강하지 못한 태도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아이 역시 미국이라는 낯선 환경과 가족이라는 새로운 사회가 불편했다. 매일매일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그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엄마와 아이 사이에 불편한 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큰 좌절감에 빠지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잘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는데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를 책망하고 상처를 입히면서 한동안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지냈어요.”
아이와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마침내 어떤 해결점을 찾지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레이스씨는 스스로 한가지 룰을 정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안아주는 것. 예진이를 마주하는 순간이 어떤 상황이든, 현재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녀는 예진이를 안기시작했다. 마음이 열리지 않을 때는 행동을 앞세우는 것도 하나의 묘책이 될 수 있듯이, 아직 감정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렇게 몸으로 아이를 가까이하다보니 예진이와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엄마가 변한만큼 예진이도 달라지면서 서로가 어렵고 불편했던 단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와 내 가족이 오롯이 누리던 행복과 안락함을 덜어내는 대신 그만큼 예진이에게 나눠줘야 하기때문이다. 긴 갈등과 아픔 끝에 이제는 친딸같은 편안한 관계로 발전했고 아픈 세월만큼 가족들간의 애정이 더욱 단단해지고 보니, 이제는 여느 엄마와 마찬가지로 예진이의 미래와 삶에 대한 염려가 깊어졌다.
“입양이 아닌 보호자 관계라 졸업 후에 대한 걱정이 사실 제일 크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성인으로써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른 신앙인으로 자라길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를 통해 가족을 알고 사랑을 알고 예진이 자신도 그런 가정을 이룰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가족들 중에 예진이 문제를 아주 쉽게 풀었던 사람은 바로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현재 Eastern Christian School 8학년에 재학 중으로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명랑한 아이다. 아빠와 엄마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이성이나 신앙, 또 의무감으로 예진이를 대했다면, 데이빗은 있는 그대로의 예진이를 받아들였다. 성별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어느 정도 있어서인지 같이 한데 어울려 놀지는 않았지만, 아무 조건이나 요구없이 예진이의 존재를 존중해줬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당장은Bergen Academies에 진학하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할 계획이란다. 예진이가 처음 가족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고 좋아했던 데이빗은 가족이 함께Vacation을 가거나 가족 모임이 있을 때는 누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며, 예진이가 다른 누나들처럼 자신을 돌보아주고 위해줄 때 정말 누나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예진이는 두 살 때, 한 살 많은 오빠와 함께 동명보육원에 맡겨졌다. 남매가 무슨 이유로 보육원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예진이가 4학년이 될 때까지 서로 소식을 모르다가 보육원 선생님과 예진이 아빠와의 우연한 만남 이 후, 현재는 가끔 안부를 듣는다고 한다. 예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YANA를 통해 미국에 한차례 방문했고, 이 후 신씨 가정과 한 가족이 되었으며 현재는 데이빗과 같은 사립학교 11학년에 다니고 있다. 한국에서 보다 훨씬 자유로운 토론분위기의 학교가 너무 인상적이고,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는 예진이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자신이 겪었던 마음의 고초를 조금 털어놓았다.
“제가 평생 가족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했잖아요. 가정이라는 것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자유로왔던 보육원 생활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자신이 처한 삶과 환경 너머를 내다보는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그저 하루하루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보육원 아이들이라면 흔히 품을 수 있는 생각이다. 남에게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이 가장 두려울 수 있는 환경의 아이들이 자신이 남과 다른 큰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4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통해 예진이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고,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준 아빠와 엄마가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알게된 것과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말도 전했다. 가끔은 보육원 아이들과 어울려 길거리 음식도 사먹고 함께 이야기하며 놀던 시간이 그립다는 예진이는 아직 보육원에 남아있는 오빠와 카톡으로 자주 대화하며, 지금은 안정되고 행복한 미국생활을 하고있단다.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사라지고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해진 현대사회는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지 모르지만, 혈연과 운명공동체라는 절대적 가치관이 허물어진 그 자리에는 누구라도 기꺼이 가족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숨어있다. 신순규씨와 그의 가족은 그 가능성을 삶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그것은 미래가 암울한 한 아이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꿈꿔볼 수 있는 큰 선물이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하는 힘은 바로 사랑이며, 신순규씨 가족들은 그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신순규씨와 그 가족들이 살아가는 법은 내 가족의 안위에만 집착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한번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