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의 영국 시골살이 / 봄편
글 정소교

꽃사과 그네 따사로운 햇살에 창을 열면 집 뒤를 에워싼 언덕 가득 피어난 꽃사과의 여린 꽃잎이 봄바람에 하얗게 흩날린다. 정원 한 편 사과나무에 매달아 둔 그네에서 힘차게 발 을 굴리는 딸의 웃음소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향긋한 사월의 눈송이를 쫓아 강아지, 무 수리도 깡충깡충 분주하다.

산사꽃 꽃들이 만발한 사월에는 바람결에 스치는 달콤한 향을 따라 산책길을 나선다. 돌담 길 아래로 코를 박고 킁킁대는 무수리만큼 나와 딸, 루나의 코도 바빠진다. 희미하게 왔다가 금세 사라지는 달콤한 향기에 발길을 멈추고 사방 을 둘러보며 꽃나무를 찾는다. 양 떼 목장 입구의 야생 장미 꽃망울은 아직 터 지지 않았고 앙상한 가지 위로 올망졸망 피어난 산사꽃은 아주 가까이 코를 대봐야만 겨우 눈치챌 수 있는 정도-.


블루벨 영국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블루벨 꽃은 사월에서 오월 초순까 지 영국 전역에 걸쳐 피어난다. 전 세계 블루벨은 반 이상이 영국에서 자라지 만 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래된 숲 속에 야생하기에 숨은 꽃밭을 찾는 재미가 있다. 숲 속 가득 깔린 보랏빛 카펫을 발견하면 한아 름 꺾어 물병에 꽂아 두고 싶 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야생 블루벨은 법으로 보호받는 종 이다. 일 이주면 모두 사라질 예쁜 꽃망울들에 부지런히 눈 도장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블루벨 꽃밭 은은한 꽃향기의 근원을 찾아 코를 따라 걷다 보면 갈림길 끝 한편으로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매일 걷다시피 하는 산책로이지만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빽빽한 나무 사잇길보다는 반대편 개울물을 따라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월은 다르다. 나도 루나도 개울길 대신 숲길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보랏빛 종들이 조롱조롱 요정 모자처럼 매달린 블루벨 꽃밭을 찾고 싶어서다.
산마늘 꽃밭 블루벨 꽃들이 질 즈음 다시 나의 코가 바빠진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 가는 알싸한 마늘향을 따라 가보면 그늘진 비탈길에 핀 산마늘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어릴 적 울릉도 외삼촌께서 보내주시던 추억의 특산물 명이나물이 이 곳 웨일스 지천 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산삼을 본 심마니처럼 환호했었다. 다행히 상업 목적이 아닌 수렵채집은 합법 이라 하얀 꽃대가 피기 전 여린 잎들을 따다 페스토 소스에 바질 대신 넣어 먹거나 장아찌를 담가 일 년 내내 두 고맛있게 먹는다.



가시금작화 연중행사 같은 산마늘 채집이 끝나면 이제는 좀 여유가 있다. 두꺼 운 장갑에 바구니를 들고 진한 코코넛 향기를 따라 설렁설렁 걷는다. 산등성이 나 호숫가, 바닷가 절벽에 이르기까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흔한 샛노 랑 꽃나무는 가시금작화이다. 향긋한 꽃잎을 말려 차로 마시거나 와인을 만드 는데 이름처럼 가시가 가득해서 맨손으로 따다가는 억센 가시에 찔리기 십상 이라 반드시 두꺼운 장갑을 낀다. 어느 날 꽃을 따다가 남편이 말했다. “When gorse is out of bloom, kissing is out of season.” 가시금작화 꽃이 지면 사랑 의 계절도 끝난다는 뜻의 영국 속담이란다. 하지만 생명력 강한 가시금작화는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운다는 ‘반전’이 있었으니! 이는 곧 영원히 지지 않는 사랑 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말 그런지 산책 길마다 유심히 살펴봤는데 가시덩굴만 남은 듯 보이던 한겨울에도 군데군데 숨어있는 꽃송이를 보니 영락없는 사실 이었다. 너무나 흔해서 누구도 관심 있게 보지 않는 가시금작화지만 조용하고 은은한 사랑을 일 년 내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둘러 쌓인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나의 삶을 비춰보게 된다. 황홀한 보랏빛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블루벨에는 독성이 있 다. 산마늘의 하얀 꽃망울이 터지면 눈이 내린 듯 아름답지만 잎이 질겨진 다. 가시가 너무 억새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금작화에서는 놀랄 만큼 달콤 한 향기가 난다. 어떤 꽃은 눈을 뚫고 올라오고 어떤 꽃은 밤에만 핀다. 저 마다의 다양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자랑하는 꽃들을 보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한순간 화려하게 피다 가는 꽃과 있는지 없는지도 모 를 만큼 은근히 피고 지는 꽃, 잘못하면 독이 되는 꽃과 잘 쓰면 약이 되는 꽃-. 어느 쪽이든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꽃으로 찾아온 존재들이다. 피는 시기와 향기, 품은 씨앗도 모두가 다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각자의 삶이 모여 하나의 큰 자연을 이룬다. 아름다운 선율처럼 어우러진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은 어떤 향기를 맡게 될까?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쉬며 한 걸 음 한 걸음, 나는 또 꽃산책을 나선다.

정소교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자연에서 나는 음식 을 먹어야 입덧이 가라앉는 바람에 자연의 소중함 을 절감하고 시골 행을 결심, 200년 전 웨일즈 풍 을 그대로 간직해 문화재로 등재된 작은 시골 마 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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