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의 영국 시골살이 / 봄편
산새가 휘파람을 부는 나뭇가지 끝으로 아기 손톱처럼 작고 여린 새싹들이 돋는다. 겨울의 끝자락에 제일 먼저 봄 소식을 알리는 설강화가 차가운 땅을 뚫고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면, 제 차례를 기다리던 수선화와 튤립들이 앞다투어 빨갛고 노란 꽃 봉오리들을 터뜨린다. 어둡 고 긴 겨울 터널을 무사히 통과해 만나는 초록 들판 위 반가운 꽃 잔치-. 아찔할 만큼 달콤한 향기로 집안을 채우는 히야신스와 알록달록 야 트막한 꽃 길을 열어주는 프림로즈…, 따스한 햇살이 닿는 곳마다 자연은 저마다의 낯빛으로 봄날을 화답한다 .
꽃 피는 삼월이면 가슴이 설렌다. 오늘이면 만날까, 내일이면 만 날까, 손꼽아 기다리던 아기 양들이 어느 날 문득 들판마다 뭉게 뭉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깨끗한 산과 바다 사이로 푸른 초원이 드 넓게 펼쳐진 웨일스는 그야말로 양들의 천국-. 그 숫자가 무려 천 만 마리에 달해 웨일스 인구 세 배를 폴짝 뛰어넘는다. 그런 만큼, 가는 곳마다 사람보다 양 떼를 더 자주 만나는 게 놀랄 일도 아니 다.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아기 양들의 보송보송한 솜털과 쫑긋 한 귀…. 엄마 젖을 빨 때면 학교 종 치듯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양 꼬랑지를 구경하고 싶어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책길을 나선다.
자라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엄마 젖 빨기에 여념 없던 녀석들이 어느 새 어미 따라 풀도 뜯고 친구들과 껑충껑충 몰려다니며 몸싸 움도 벌인다. 잘 먹고 잘 놀며 자라는 봄날의 양들을 바라보고 있 노라면 십 년 전 이맘때 태어난 딸의 아기 적 모습이 떠오른다. 품 에 쏙 안겨 눈을 맞추던 갓난아기 루나는 열 살 소녀가 되었고 나 는 엄마 명찰을 단지 어느덧 십 년이 되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도 지나고 보니 짧기만 하다.
하지만 모유수유와 육아의 산을 넘어가며 아이를 키워낸 그 시간들이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갓 태어난 새끼 양들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을 뺏겨 한참을 구경하다 집으로 돌 아오면 잠들기 전, 젖을 물리던 어미 양의 듬성듬성한 털과 지저분한 몰골이 떠오르곤 했다. 출산 후 머리카락이 빠지는 우리네 산모의 모습과 어쩜 그리 쏙 닮았는지 내 지난 시간을 비 춰주는 듯해 안쓰럽다가, 이내 나를 키우느라 힘들었을 친정 엄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 해진다. ‘엄마’ 역할에 실수하지 않으려 긴장한 나머지 나도 우리 엄마도, 누군가의 자식이라 는 사실을 때로 잊고 지냈다. 매년 새로 태어나는 봄날의 아기 양들과 한때는 새끼였을 그들 의 어미,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어미가 될 새끼 양들의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그 속에서 함 께 자라는 우리의 삶을 엿본다. 아이가 자란 만큼 나도 자랐고, 나의 부모 또한 그럴 것이다.
삼월의 탄생화이자 웨일스 국화, 수선화의 원어명은 ‘나르시서스(Narcissus)’다. 노란 나팔 모양의 부화관을 늘어뜨린 모습이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스를 닮았 다 하여 ‘자기애’라는 꽃말을 얻었다. 매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사순절 시기가 돌아 올 무렵 꽃을 피우기에 ‘부활’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기도 한다. 거대한 자연의 순 리에 자신을 비춰 본다면 사랑은 결코 자기애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봄날의 양 처럼 포근하게 피어나 번져가는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도 어김없이 지나가고 또 다시 꽃피는 봄이 되었다. 볕이 닿 는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사랑의 싹이 움트길 바라며 3월에 태어 난 귀여운 양들과 사랑하는 나의 딸 모두 “Happy Birthday!”
정소교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자연에서 나는 음식을 먹 어야 입덧이 가라앉는 바람에 자연의 소중함을 절감 하고 시골 행을 결심, 200년 전 웨일즈 풍을 그대로 간직해 문화재로 등재된 작은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www.youtube.com/c/SOKYO소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