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독백 “정말 잘 살았다!”
금년 7월 4일은 243번째를 맞이하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늘 그래왔듯이 올해도 워싱턴을 비롯해 미 전역에서 축하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폭죽을 터트리며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질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기 때문에 조국을 위해 사심없이 헌신해 온 ‘군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 온 나라와 국민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미군들, 어디서든 그들을 만날 때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군인을 더욱 군인답게 빛내주는 유니폼, 바로 그들이 입고있는 제복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군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미군들의 군복, 그러나 그것을 만드는 한인 기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닥 많지 않다. 지난 2005년 부터 지금까지 미 육군은 물론 공군, 해군에 이어 해병대에 까지 군복을 납품하고 있는 ‘베델 인더스트리즈’의 김선종 대표,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일군 후 이제는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며 특히, 한인사회를 위해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삶 이야기를 맘앤아이에 담았다.
인터뷰, 글 최가비 사진 MOiM studio


김선종 대표와의 인터뷰를 위해 몇가지 자료를 점검하던 중에 직원 700명을 거느린 기업체 대표, 그것도 군복을 생산하는 사업체의 CEO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런데 인터뷰 장소에서 김대표를 직접 대면하고 보니 그녀의 얼굴 생김이나 체구가 너무나 단아하고 여성스러워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표는언제,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사업가의 꿈을키워왔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 저는 아주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고 그저 나중에 현모양처가 되고싶었던 그런 평범한 아이였었어요. 그 시대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거라 여기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러다가 1972년 경 대학 졸업을앞두고 캄보디아 대사관에 취직을 하게되었어요. 당시 캄보디아가 크메르 공화국 시대였기 때문에 한국에 대사관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1975년 경 캄보디아가 다시 민주 캄푸차로 바뀌면서 대사관을 나와 경희대 조영식 학원장님-나중에는 대학 총장님이 되셨는데- 그 분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학원장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일테면, 삶을 대하는 태도나 또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가까이서 많이 배웠죠.. 제게는 맨토같은 분이셨으니까요. 그때 거기서 남편을 소개받고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되었어요.”
모든 이민자의 삶이 그러하듯 김대표의 삶도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전투복 공급권을 획득한 유일한 한인 업체 ‘베델 인더스트리즈(Bethel Industries)’를 잘 성장시켜온 데는 김대표만의 올곧은 삶의 철학이나 큰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이민 생활이 이제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네요. 처음 미국으로 와서 저는 Becton Dickinson이라는 의료기기 업체에 입사했고 남편은 트레이딩 컴퍼니에 취직하면서 그렇게 이민생활을 시작했었죠. 그러다가 Garment Business로 눈을 돌렸고 만삭의 몸으로 사업에 매달릴 만큼 열심히 했던 탓에 존스 뉴욕, 랄프 로렌 그리고 버버리 등 굵직굵직한 업체에 물건을 납품할 만큼 사업을 안정적으로 키웠어요. 그러다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시장이 위축되고 매출이 절반가량 줄어들면서 저희 비즈니스도 위기를 맞게 되었어요. 당시 비슷한 비즈니스를 하던 업체들이 공장을 중국 등 해외로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외국으로 사업체를 옮겨볼까 고민했었는데,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도 중요하게 생각되어 외국사업 계획을 철회하고 정부 조달 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지금의 베델 인더스트리즈를 설립했어요. 그런데 정부관련 사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전혀 경험이 없던 저로서는 그저 묵묵히 시간과의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죠. 오래 전부터 군납을 맡던 경쟁사들을 제치고 입찰을 따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입찰 시도 10번을 실패하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11번째 입찰 신청을 한 후 마침내 입찰에 성공을 했어요.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 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어요. 그 전에 커머셜 브랜드 사업을 할 때 저를 지켜봤던 거래처들이 입찰에 필요한 추천서를 기꺼이 작성해줬고 저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일을 해왔던 덕에 결국 육군 전투복 입찰에 성공했고 그 일을 계기로 나머지 과정은 어렵지 않게 풀렸어요. 이 후로 일반 여성복을 납품하던 시절에 비해 회사 규모는 4배로 커져서 저지시티와 노스버겐 두 군데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현재 약 70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기업체 CEO들은 삶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의지와 능력이 일반인들과 사뭇 달라보인다. 위기 때마다 적잖은 좌절감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뜻을 이루게 한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물었다.
“제가 경희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학교에서 Thornton Wilder의 ‘Our Town’이라는 드라마를 공연했는데 제가 주인공을 맡게 되었어요. 그 드라마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깊이 숙고하게 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있었어요. 극 중에 주인공이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면서 독백을 하는 대목이 있어요. 죽음에서 살아돌아왔다 해도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거죠. 그때 주인공이 내뱉은 독백이 기억나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않는 시간, 인생의 매 순간 삶을 느끼고 즐기며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자주 그 독백을 떠올렸어요. 아마도 그 말이 저의 이민생활에 어려움과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것도 내 삶의 일부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비교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데 그 부분이 많은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베델 인더스트리즈는 2005년 육군, 2007년 공군, 2008년 해군, 이 후에는 해병대까지 납품까지 성사시켰고 2008년 정부 조달청으로부터 최고 협력업체 상을 수상했다. 또한 김대표는 2005년 아시안 여성경제인협회(AWIB) ‘리더십상’을 수상했고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여하는 Urban Angels Award를 수상한 바 있다. 또한 2012년 Everything Jersey city Festival에서 Leg-end 상을 수상했으며, 세계한민족 여성네트워크(Korean Women’s International Network-Kow-in) 뉴욕지회장을 지냈다. 화려한 수상 경력 뒤에는 여성 사업가로서의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김대표는 그 어려움을 오히려 장점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이민 초기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시안 여자 CEO라는 점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을 당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아무리 자유롭고 개방된 미국이라고 해도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그런 인식들이 있잖아요. 여성사업가에 대한 인식이 그렇고, 또 마이너리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렇죠. 그런데 정부 조달사업을 하면서는 오히려 그 아시안 여성이라는 점이 플러스로 작용했어요. 여성 CEO라는 것이 어필이 되었고, 또 마이너리티라서 얻을 수 있는 어드벤티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언젠가 한번은 비즈니스 관련 컨프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대략 900여명의 참여 자 중에 여자도 별로 없고, 아시안도 그닥 많지 않아서 처음엔 좀 위축되기도 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 부분이 플러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있어요. 때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잖아요.
커머셜 브랜드를 생산하는 일과 군복을 만드는 일은 얼핏 같은 분야같지만 얼마간의 차이가 있어보인다. 그 차이는 무엇인지, 또 상대적으로 어떤 비즈니스가 더 어렵고 힘든지 궁금했다.
즐거움을 주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커머셜 브랜드가 훨씬 재밌다고 할 수 있어요. 트랜드에 맞게 옷을 디자인하고 히트 상품을 만들어 내고 그런 과정들이 재밌거든요. 그런데 군복은 우선 보아 예쁘다 멋있다 그런 차원의 옷이 아니잖아요. 특수한 목적을 가진 옷이기 때문에 정부가 원하는 규격에 정확히 맞추는게 중요하죠. 쉽게 말해 ‘One Style, One Color’ 의 룰을 지키는 심플한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하기에는 훨씬 수월하죠. 커머셜 옷은 브랜딩을 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군복은 아이템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짧게는 2년 반, 길게는 5년 마다 입찰을 해야하기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요. 그런 부분에선 어려움이 있죠.


김선종 대표는 이민자로 살면서 늘 사회에 빚진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사람들이 국가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를 위해 기꺼이 마음을 나누고 봉사하고 후원하는 삶의 태도를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단다. 평소 그 빚진 마음이 결국 김대표를 사회환원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씨앗이 되었다.
사업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보니 이 모든 것이 나혼자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눈을 바깥 세상으로 돌려 작은 것이나마 사회로 환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Non-Profit 인 CSK재단을 설립해 지역 학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부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우리회사가 있는 North Bergen High School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일을 몇년째 이어오고 있어요. 그리고 현재는 패밀리 인 터치(Family in Touch)에서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고, 또 잉글우드 병원의 보더멤버(Boarder member of Englewood Hospital)로 활동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여전히 사업으로 바쁘다보니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늘 있지만, 그래도 뭔가 내가 속한 사회와 특히 한인커뮤니티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페밀리 인 터치는 가정을 중시하는 김대표의 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패밀리 인 터치는 어찌보면 ‘가정이 잘되야 사회가 잘되고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라는 모토를 기반으로 하고있을 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가정사역장인데요, 패밀리 인 터치의 정종숙 박사님의 권유로 협력하게 되었어요. 이 일에 발을 들여놓을 때 두가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하면서 시작했어요. 첫 번째는 한인 커뮤니티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바램, 그리고 두 번째는 패밀리 인 터치 내에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활성화시켜 많은 한인들이 그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도움을 받게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레오니아에서 운영되던 페밀리 인 터치를 리틀패리로 옮겼고 작지만 자체 건물을 세웠고 앞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것에 좀 더 힘을 기울이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올해 10월 경에 갈라를 준비하고 있는데 마음을 같이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패밀리 인 티처를 격려해주시면 좋겠어요.
잉글우드 병원의 보더멤버로 봉사하며 한인들에게 의료, 의학 정보들을 보급하며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홍보하고 알림으로 한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간다는 점에서 나름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잉글우드 병원의 보더멤버로 제안을 받아 봉사를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제가 먼저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사실 저희 남편이 저보다 훨씬 많이 한인사회 내에 있는 작은 단체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마음을 많이 쏟아왔었죠. 저도 남편의 영향을 받고, 우선적으로 잉글우드 병원 내 한인들의 Health 와 Wellness 를 위한 Korean Center 설립을 도왔어요. 이 전에 잉글우드 병원 및 의료 센터라고 불렸던 잉글우드 헬스 (Englewood Health)는 현재 뉴저지 주, 약 6 개 카운티 내 100여 개의 장소로 확대되어 잘 성장하고 있어요. 센터가 하는 중요한 일은 더 나은 의료 서비스에 대해 이해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있는 한인 환자와 그 가족을 교육하고 지원하는 것과 또 응급 치료, 암 위험, 심장 질환 및 당뇨병 및 간염과 같은 만성 질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역사회 프로그램 및 이벤트를 개발하고 있구요. 이 일의 일환으로 한인 이민자들에게 건강과 웰빙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일 년에 만 명이 넘는 한인 이민자들을 서로 잇는 미국 최초의 카카오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어요. 병원 이사로 참여하면서 거기 이사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살피고 또 그 분들은 우리보다 앞선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선경험을 통해 배워야할 것을 잘 배워 우리 한인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런 부분을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어요. 이사라는 직책은 봉사직이잖아요. Korean Health나 Wellness 등 건강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여러 가지 방법에 관심을 갖고 일을 하고 있어요. 잉글우드 병원 자체에서 한달에 한번 각 부서별로 전문의들이 나와서 세미나도 하고 의학적인 계몽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많이 있어요. 그런 프로그램들을 우리 한인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인건강센터를 통해 다양한 일을 할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김대표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고 작년에 손주를 얻었다. 사업으로 바쁘게 살았던 탓에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녀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어릴적 소망을 여전히 품고 사는 다정하고 순종적인 아내, 그리고 따듯한 어머니였다.
아들이 둘 있어요. 아이들한테 늘 그런말을 했어요. ‘평생 이 여자 말만 듣고 살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서두를 것 없다.’ 말은 쿨하게 했지만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 내심 조바심이 많이 났었어요. 그런데 둘 다 결혼했고 둘째아들네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작년에 손주를 얻었구요. 할머니로서 잘 챙겨주지 못하는게 늘 미안하지만, 늘 내 아들, 내 며느리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살고있어요. 바쁘게 살다보니 자식들을 위해 해준 것은 별로 없는데, 아이들이 잠이 들어있을 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줬던 기억은 있네요. 사실 아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 쯤 소소한 갈등이 있어서 학교에서 사춘기 관련 세미나를 하길래참여했더니 자녀와의 문제가 제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아들의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죠. 돌이켜보면 제 삶을 여기까지 이어오게 된 데는 참 좋은 남편을 만난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흔히 여자는 젊어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고, 늙어서는 남편과 자식에게 순종한다고 하잖아요. 사실, 순종이란 말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늘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성공적인 비즈니스, 그리고 자신의 것을 사회로 환원하고 봉사하며 사는 삶, 그것은 어쩌면 Social Being 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마침내 얻고싶어 하는 인생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싶다. 한 삶을 부지런히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한인사회 많은 젊은이들에게 김대표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명료한 한 마디였다.
“최선을 다 해라!” 말은 쉽지만 사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게 아니에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최선이 아닌 경우도 많거든요. 정말 죽을만큼 최선을 다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에 헛된 노력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 작은 수고와 노력들이 모여 결국엔 좋은 인생을 완성하는 거니까. 사실 이 인터뷰가 그저 한 사업가를 취재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기회를 통해 제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볼 수 있어서 참 감사했어요. 지금 이 순간에 가장 하고싶은 말은 삶이란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마지막 순간에 ‘정말 잘 살았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가치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뜻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그 뜻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 그리고 나중에 삶의 목표를 이루고 뒤돌아보면 알게모르게 주변의 크고작은 도움들이 많았음을 알고 감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제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삶이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램 뿐이라는 고백을 드리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