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수제 아이스크림 사라 박 대표
글_맘앤아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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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애니가 9살이 되던 2000년 여름, 그녀의 어머니 사라는 미국이란 땅으로 이주라는 쉽지 않은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도 딸의 꿈과 희망을 지지하며, 아이가 그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한 멋진 여정의 끝에서, 그녀는 다시 아이스크림 가게로 새로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박 대표의 동화 같은 여정은 비슷한 경험의 이민자들에게는 공감으로, 지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동기 부여로 다가옵니다. 특히, 2023년도 절반이 지나는 이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사라 박 대표의 이야기가 훌륭한 지표가 되길 바랍니다.
Sarah’s Handmade Ice Cream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Sarah’s Handmade Ice Cream의 대표 Sarah Park입니다. 2018년 여름, 8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델리(Delicatessen)를 잘 정리하고 매도한 후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6개월은 푹 쉬고 여행도 하면서 잘 지냈는데요. 그 시기에 한 친구가 Cuisinart에서 만든 작은 아이스크림 기계를 선물로 사줬어요. 덕분에 원래 취미 삼아 만들던 아이스크림을 좀 더 많이 만들어 이웃 및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는데요. 생각보다 “맛있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잘 지내긴 했지만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는 것에 점차 지루함을 느꼈고, 마침 그때 친구 한 명이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만든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다는 게 그가 한 제안의 제일 큰 이유였고, 그 말은 저 자신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감과 함께 창업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Sarah’s Handmade Ice Cream의 인기가 무척 높은데요. 기존 아이스크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 일종의 제 철학은 ‘음식은 최고여야 한다’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으며, 제 취향도 감히 고급이라 자부합니다. 게다가 제가 음식 관련 사업을 시작하기로 정한 지역이 ‘고급’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시장에서 흔하디흔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서는 그곳에서 절대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어요. 아이스크림 고급화의 시작은 천연 재료 사용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천연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원가에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더불어 기존 시장에 있는 아이스크림들이 정도 이상으로 단 것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덜 달면서도 자연스러운 풍미가 느껴지는 고급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게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업 후 운영하시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감사하게도 대체로 모든 것들이 순조로웠습니다. 다만, 팔목이 약했던 저는 너무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떠서 담아야 했던 오픈 후 첫 2주 동안이, 제가 겪은 ‘눈물 날’ 정도의 어려움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런 눈물 어린 경험의 시간을 통해 바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딱딱할 정도로 보관하면 맛도 없을 뿐 아니라, 종업원들과 저의 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결과적으로 모든 냉동고의 온도를 올려보면서 부드러우면서도 뜨기 좋은 수준의 적정 온도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역할 분담을 통해 따님과 함께 운영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각자 맡으신 분야와 더불어, 현재 함께 일하는 35명의 직원 관리 노하우 및 관련 고충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스크림 개발 및 품질 관리와 주방 팀 인력 관리 및 수준 향상을 위해 집중했고, 딸 Annie는 프론트 라인(front line), 즉 종업원 채용, 교육, 서비스 질 향상에 집중했습니다. 더불어 애니는 본인의 최강점인 지역 사회와의 연계, 즉 마케팅과 홍보 부문에서도 큰 활약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태프들 대부분은 하이스쿨이나 컬리지에 재학 중인 20세 이하의 어린 친구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곳이 첫 직장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떠서 담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은 물론, 행주는 짜본 적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손님은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응대 시 어떤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지도 매뉴얼화해서 교육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니는 우수한 젊은 직원들을 뽑아 가르치고, 그들의 실력을 향상하는 일에 과거 교육자로서의 실력을 발휘하며 열과 성을 바치고 있고, 거기서 큰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매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도전 중 하나는, 1~2년 동안 일하던 직원들이 대학 및 대학원 진학을 위해 매년 여름이면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여 다시 교육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역 비영리 단체 및 사회단체에 아이스크림 기부 활동을 진행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부를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팬데믹 기간에, 애니와 저는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의 성공과 지역 주민들의 후원에 어떤 방식으로 감사하면 좋을지 대화를 나누던 중, 지역 병원의 최전방에서 일하고 계신 의료진에게 아이스크림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Sibley Memorial Hospital과 Suburban Hospital의 응급실에서 저희의 뜻을 받아들여 주셨고, 그로 인해 200개씩의 아이스크림을 각각의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수고하며 피곤함에 지쳤던 의료진에게 우리 아이스크림은 큰 인기를 끌었고,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도 우리를 통해 그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연락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견들을 반영한 매칭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고객들이 한 스쿠프(one scoop)를 기부해 주시면 우리가 한 스쿠프를 매칭하여 의료진에게 보내는 약속을 이행하여, 각 병원에 296 스쿠프씩을 더 보내게 되어, 펜데믹 동안 두 병원에 총 992 스쿠프를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2021년에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다시 한번 나서게 되었는데요. 그해 3월 중 한 주간 매출의 30%를 우크라이나에서 고난받는 이들에게 보내는 일에, 주민들이 기대 이상의 많은 아이스크림 구매로 동참해 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총 미화 3,862달러를 성금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별 기부 외에도 지속적인 기부로 지역 자선 단체인 국립 보건원 산하 Children’s Inn의 직원, 가족, 환자들을 위해 매년 여러 차례 아이스크림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희의 도서 판매 수익금 전부를 Children’s Inn에 기부해 왔습니다.
Sarah’s Handmade Ice Cream의 성공 비결을 다들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습니다.
성공이요? 만약 우리가 성공한 것이라면, 그 비결은 저와 제 딸이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제가 만든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 그리고 고객들과의 일화와 에피소드에 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이야깃거리가 넘쳐납니다. 매달 바꿔가며 만들어 내는 40가지의 맛을 내기 위한 저의 레시피는 이미 100개를 넘었고, 150개를 제 레시피 북에 담기 위해, 저는 자주 좋은 레스토랑과 베이커리와 바에 가서 마셔보고 음식도 주문합니다. ‘Sarah’s Pool Party’라는 저의 여름 최대 히트작은 제 친구와 동네 바에 가서 마신 칵테일에서 얻은 힌트로 새로운 맛을 만들어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2호점을 내셨는데요. 새 매장을 여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으셨는지요?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매장을 확장할 계획을 갖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기존 매장이 잘 되고 있더라도 이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매장을 연다는 것은 여느 비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위험 부담이 따르지만, Sarah’s Handmade Ice Cream은 성공적으로 2호점을 열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후원도 받고 있으므로, 정말 행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호점의 오픈은 2020년 10월에 팬데믹 기간이었고, 기존 사업체들도 문을 닫거나 난항을 겪고 있을 때여서 다소 두렵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가오픈과 정식 오픈에 집에서 줄곧 갇혀 지내시던 고객들이 물밀듯이 찾아와 주신데다, 온라인 주문은 밤사이에도 계속 들어올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매장 확장은 앞으로 좀 더 지켜보며 진행하려 합니다. 최근 들어, 뉴욕은 물론 마이애미, 샌디에이고, 심지어는 서울과 베트남에서도 프랜차이즈 문의가 들어오는데, 아직은 3호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호점 오픈은 내년 2월쯤으로 예상하며, 저희의 유일한 노하우인 “최고의 맛과 최고의 서비스”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Sarah’s Handmade Ice Cream은 사라 대표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또한 세상 속에서는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소망하시나요?
다음 달이면 62세가 됩니다. 이쯤 되면 삶의 의미, 일이 주는 기쁨과 고마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입니다. 저희 매장을 방문하시는 고객 대부분이 즐거워하시고, 맛있다는 칭찬을 잊지 않는 비즈니스를 제가 일궈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예쁘고 풍성하게 담아 전달하는 직원들의 표정, 그리고 그것을 받아 놀라운 표정으로 즐기는 고객들을 바라보며, “아, 이리도 좋을 수가!” 하는 기쁨이 절로 일어납니다. Sarah’s Handmade Ice Cream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가치와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특히 최고 품질의 재료만을 고집하는 저희의 고유 레시피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동시에, 사회 환원과 기회 제공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지역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에도 똑같이 자부심을 느낍니다. 실제로, Sarah’s Handmade Ice Cream은 지역 YMCA의 모든 지부에 혜택을 주는 연례 ‘Bethesda Turkey Chase’ 이벤트에 후원자로, 2019년 첫 매장 오픈 이후 줄곧 후원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금 모금 행사 개최를 요청하는 지역 내 학교와 비영리 단체의 모든 요청을 100% 존중하고 수용하여 실현해 왔음에도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더불어 우리 중 대다수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직원들을 개발할 기회를 소중히 여깁니다. 또한 아이들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함께 책을 읽으며 간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우리의 작은 도서관도 사랑합니다. 저는 제 딸이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고, 결국 애니는 볼티모어의 한 초등학교에서 글쓰기 교사로, 이후 몽고메리 대학에서 작문 교수로 일했습니다. 앞으로도 Sarah’s Handmade Ice Cream이 지역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고객 및 직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동안에도 고객 및 직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주 과정에서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제가 아홉 살 딸 애니를 데리고 한국을 떠난 해는 2000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저는 1993년에 이혼했고,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딸을 키우면서 한국보다는 미국 사회가 열려 있고, 아이와 저 모두에게 새로운 환경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흔이 되기 전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감히’ 이주를 결정했습니다. 모두가 말렸던 결정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후회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아이는 등교 첫날부터 너무 즐거워했고, 옆집 가족들은 아이의 좋은 보호자를 자처했으며, 저는 안심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새로 찾은 직장은 미국에서의 경험이 없는 저에게 적은 주급을 주었으나, 저는 제 인생에 대한 투자의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로도 충분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애니씨는 바이올린에도 재능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애니는 4살 때부터 한국에서 피아노를 쳤었고, 재능도 있었어요. 그러나 미국에서의 이민 생활 초기에는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아야 해서 피아노를 살 수 없었어요. 딸아이는 첼로에도 관심과 열정을 보였지만, 사이즈에 압도당한 저는 이동에 간편한 바이올린을 순전히 “편의상”의 이유로 딸에게 권했어요. 이후에 하이스쿨과 보스턴 칼리지에 이르기까지,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콘서트마스터 자리를 지켰어요. 제 의도에 다소 ‘이용’당한 듯하지만, 애니는 지금도 몇몇 어린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고,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면서 바이올린과 여전히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고려하고 계신 분들에게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다면요?
이민을 고려하고 계신다면,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해와 열린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가치관, 얼굴색, 습관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기보다는 호기심과 애정을 갖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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