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에서 세계적인 KPOP DJ까지, 끝없는 열정의 스토리

인터뷰/글_김해용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해 국제적인 DJ가 된 DJ MOOBEK의 여정은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힙합과 팝에 대한 사랑으로 음악을 쫓았고, 이는 클럽에서의 성공적인 DJ 경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사회적 편견과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후 DJ MOOBEK은 시애틀에 각종 DJ 경연에서 우승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The Bride Awards’에서 ‘최고의 한국 DJ’로 선정되며 더 큰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이벤트 기획자로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고 있으며, KPOP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화원 주최로 3월 23일 뉴욕 링컨 센터에서의 공연을 앞둔 그는 이 공연이 많은 관객이 함께 즐기며 한국 문화를 경험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3월 뉴욕 공연을 앞둔 DJ MOOBEK와의 유쾌했던 온라인 영상 인터뷰 현장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에서 국제적인 DJ가 되기까지의 여정

1993년 미국에 살던 사촌 형이 힙합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보내줬어요. N.W.A의 앨범이었죠. 살면서 처음 들어본 음악 장르였고, 그때부터 힙합에 푹 빠졌어요. 영어를 몰랐지만, 기회 될 때마다 미국에서 카세트나 CD에 앨범을 담아 보내 달라고 부탁했죠. 만 19살 때부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과 클럽을 돌며, 최고의 음악을 찾기 위해 경쟁했어요. 그렇게 2001년에 본격적으로 DJ 세계에 발을 들였고, 그때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했습니다. 2013년부터 미국에 살면서 DJ 프로듀서로 23년째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처음 DJ로 활동할 때는 한국에서 레코드나 CD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노래들을 어떻게든 구해서, 클럽에서 제가 어렵게 결정해서 구입한 노래를 틀 때의 그 뿌듯함은 말로 다 표현이 안 됩니다. 당시에 일본은 이런 문화가 무척 발달해서, 매달 일본을 찾았어요. 음반 가게들을 돌며 하루 종일 들으며 찾던 그 음악들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져요. 그 당시 한국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기에, 저만의 소스를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 자부심의 원천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음악들은 현재 트렌드와 맞지 않아 더 이상 쓸 수는 없지만, 그 가치와 희귀성은 여전해요.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 그 음악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자부심을 느끼죠. 그 음악들은 제게 단순한 레코드와 CD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가며 느꼈던 열정이자, 그 음악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제 모든 순간의 기록이니까요.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그리고 극복 

한국에서 DJ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DJ란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힙합 음악에 집중했지만, 공연할 장소가 많지 않았고 대우도 좋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DJ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부모님도 반대하셨습니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으며, 심지어 일부 선배들이 제 임금을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혼자 이태원의 작은 바에서 하루 6~8시간 DJ를 하면서, 저는 제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홍대 오디션을 보고 난 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홍대에서 매일 세 타임씩 DJ를 하며 이름을 알렸죠. 그러다 프랜차이즈 바의 대표님이 저를 스카우트하려 했어요. 그 새로 생긴 클럽에서 음악을 틀면 그 대표님이 가지고 계시던 전지역의 바에 저의 라이브 음악을 스트리밍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받았죠. 하지만 3개월 만에 클럽이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계약서도 없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어요. 그 불안감에 공황장애까지 생겼고, 막막함 속에서 절망적인 순간까지 겪었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했었죠. 하지만 친구의 한마디가 절 멈추게 했어요. ‘네가 만약 자살하면 나는 너의 장례식장 근처에도 안 갈 거고, 나는 앞으로 살면서 너를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살 거야’라는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러면서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고, 주변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후로 저는 마음가짐을 바꾸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웠어요. 열심히 주변에 연락하며 기회를 찾았죠. 그 노력이 결국 저를 다시 일어서게 했고, 2009년에는 한국의 페스티벌 문화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기회가 왔어요. 그 시간이 오늘날의 저를 만들었죠. 어려웠던 시기를 겪으면서, 어떻게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과거를 통해 배운 교훈들을 항상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2013년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

2008년부터 한국에 큰 클럽들이 생기면서 여러 페스티벌의 프로모터로 활동했습니다. 하루에 최대 3~5개의 일이 있을 정도로 바빴고,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20~30분 내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할 정도였죠. 너무 많은 일과 반복적인 생활에 지쳐갔고, 거의 같은 음악을 틀면서 또한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DJ로의 길을 선택했을 때 꿈은 미국에서 인정받는 DJ가 되어 미국에 진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아시아 투어를 다니며 많은 생각을 한 끝에 2011년에 미국 투어를 결심했습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르게 미국에서는 제가 하는 DJ 일로 인정받고 고객들이 제게 먼저 다가와 대화를 나누고 관심을 표하는 모습, 때로는 본인들이 미국에 다른 클럽 혹은 페스티벌 매니저들의 연락처도 주면서 도와주려는 진심에 감동하여, 2013년에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습니다. 많은 일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받은 긍정적인 반응과 인정이 이주를 결정하는 데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공연 경험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2013년 시애틀에 처음 왔을 때 무대에 설 기회가 없어 목마름을 느꼈어요. 그러다 시애틀의 한 페스티벌에서 오프닝을 할 DJ를 찾고 있단 소식을 듣고, 기회를 잡기 위해 모든 참가자가 30분짜리 믹스를 업로드하였어요. 그 후 라이브 공연과 스트리밍을 열심히 했죠. 그런데 제가 올린 믹스가 스트리밍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기록했음에도 다른 사람이 선정됐고, 결국 저는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러다 시애틀의 어느 한 클럽에서 페스티벌 믹스 경연 참가자 중 1위부터 5위를 선정해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었어요. 페스티벌 오프닝 경연에서 저를 비방하는 참가자가 있었지만,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저는 강한 승부욕이 발동했죠. 저는 제 실력을 증명했고, 실제로 저를 무시하며 인종차별까지 했던 DJ에게 발로 디제잉을 하는 임펙트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어요. 결국 투표에서 1등 하며 상금을 받았어요. 상금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죠. 물론 페스티벌 오프닝은 못 올라갔어도, 경연을 한 그 클럽에 온 모든 관객들과 디제이들에게 제가 누구 인지를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저 또한 이루고자 했던 바를 달성했다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성취와 인정

2015년 ‘The Bride Awards’에서 ‘최고의 한국 DJ’로 선정되었고, 같은 해 ‘시애틀 베스트 DJ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습니다. ‘The Bride Awards’에서 어떻게 선정됐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많은 유명 인사가 참석했고 중국 방송국과 중국의 30개 지역에서 방송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시애틀 DJ 콘테스트에 참여한 목적은, 어디를 가든 한국인으로서 더 알려지기 위해서였고, 큰 상금이 걸린 중요한 콘테스트에서의 우승이었습니다. 또 한국 동아일보 위인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제가 디제잉 하는 영상이 광화문 네거리에 크게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DJ MOOBEK이란?

DJ를 시작할 때부터 2015년까지 DJ YUP으로 활동하다 2015년에 DJ MOOBEK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MOOBEK의 작명은 단지 새로운 이미지와 음악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어요. 무백(MOOBEK)이란 이름은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 무한한 공간을 뜻하는 ‘무한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름이에요. 제 로고도 원래 인피니티 즉, 무한대를 상징했고, 이것이 한자에 ‘없을 무’, ‘흰 백’, ‘무한한 흰 공간에서 마음껏 즐기자’의 ‘무백’이 된 것이죠. 요즘은 무백이 제 진짜 이름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이름을 바꾼 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간단하고도 의미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제 철학이라고 하면, 좋은 DJ란 청중의 마음을 얼마나 빠르게 사로잡느냐에 달려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비법이라기보다 끊임없는 노력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했습니다. 요즘 트렌드 변화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경험과 스타일이 제 팬 베이스를 유지하고 지속해서 일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죠. 특히 소셜 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기회가 생겨 음악과 실력만이 아닌 새로운 플랫폼에 다른 방향으로 배워야 할 것과 요즘 젊은 친구들의 트랜드를 보고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저는 기본에 충실하며 음악에 대한 정통성을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제가 DJ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겸손함과 열정, 그리고 지치지 않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예비 DJ들에게 조언

DJ를 주 직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한다면, 음악에 대한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작하기로 결심했다면 다양한 음악 장르를 듣고, 음악의 역사와 트렌드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DJ로서 올해로 23년째인 저는 여전히 최신 트렌드를 듣고, 공부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배우기보다는 전문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유튜브나 온라인으로 배울 수도 있지만, 기계를 다루는 방법과 클럽 경험 등을 통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활동 중인 DJ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나중에 연습하거나 공연장과 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일할 기회가 종종 있으므로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경험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많은 실전 경험이 필요합니다.

비전 목표

지금까지 DJ로서 여러 무대를 누볐지만, 이제는 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그동안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만 달려왔는데, 현재 몸과 마음이 지쳐서 이제는 조금 물러서서 이벤트 기획에 집중해 볼까 해요. 아직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고, 매년 아시아와 미주 투어를 하고 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제가 만든 회사 이름을 걸고 제가 직접 메이저 이벤트를 만들고, 후배 양성과 매니지먼트까지 제 방식대로 키워나가려고 합니다. KPOP, 그리고 제가 만든 큰 이벤트에, 여러 장르와 볼거리 및 먹거리를 중심으로 직접 기획하고 실행해 보며 작년부터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하는 건, DJ로서의 저만의 스타일과 경험이 아직 많은 분에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기본을 지키며, 음악에 대한 저의 사랑과 열정은 변치 않을 거예요. DJ 무백으로서 세계 무대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현실적인 비전에서 이제 이벤트 기획자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음악과 DJ란 직업은 제 인생의 큰 부분이기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열정은 여전히 가득하지만, 이제 방향을 조금 바꿔 더 넓은 세상에 제 색깔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2024년 3월 뉴욕 공연 소개 

뉴욕의 많은 클럽 공연에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뉴욕 한국문화원(KOREAN CULTURAL CENTER NY, KCCNY) 주최로 한국을 홍보하기 위한 이벤트에 KPOP DJ로 초대받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분이 와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월 23일 뉴욕 링컨 센터에서의 공연을 위해 재미있는 음악 자료를 준비할 예정입니다. 그날 오셔서 함께 즐거운 행사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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