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 동티모르 카르민다

기억은 잊었지만, 트라우마는 남아” 

카르민다는 1926년(추정) 동티모르 틸로마르에서 태어나 1942년 16세에 3년간 동원되었다.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에는 심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 그 당 시의 기억은 물론이고 대화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여동생이 현재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던 중 일본군 이야기를 하자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일 본 숫자 이치 니 산을 발음하고 있었다.

글, 사진 안세홍

아시아 다른 나라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지난 25년간 한국을 비롯해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피해자를 찾아다니면서 일본이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아시아 태평양 연안 나라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로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인식 속에서 서구 나라들은 막연하게 일본의 편을 들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더욱이 우경화로 일본이 이 문제를 숨기는 상황에서 한국 외에 다른 나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 조차 없다. 한일 간 만의 감정의 역사가 아닌 아시아 전쟁의 역사와 인권으로 바라보기 위해 동티모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한국의 현지 피해 여성 140여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고통을 사진으로 담았다 .

끌려감, 감금, 성폭력, 버려짐 이 모든 것은 70-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녀들은 성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현지에 남겨지면서 이웃으로부터 ‘화냥년’이라 불리는 차가운 시선과 ‘명예살인’이라는 종교적 차별을 받았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아픔의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더는 누군가의 기억과 눈물이 아니라 이제는 모두의 역사와 인권으로 남아야 한다. 한일 간만의 문제를 넘어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기 위해 아시아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일본과 서구사회에 더욱더 알려지기를 바란다.

▲ 한국 김복득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해 ”

김복득은 1918년 한국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1939년 21세에 중국, 필리핀 등지로 동원되었다. 통영 앞바다에서 모집책의 손이 이끌려 중국 따리엔 유곽에서 3년, 이후 일본군의 전선을 따라 필리핀까지 이동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군함을 타고 나가사끼로 온 후 부산에 들어왔다. 고향에서는 위안부였다는 소문이나서 따가운 시선 속에 살았다.

동티모르 프란시스카▲

“나는 개나 말하고 똑같아요”

프란시스카는 1923년 동티모르 수아이에서 태어나 1942년 19세부터 3년간 동원되었다. 전쟁 중 잡혀간 여성들은 전리품으로 취급되었다.그녀는 위안소에 있는 동안 일본군이 새기자고해 군부대 문양으로 추정되는 문신을 팔다리에 빼곡히 새겨 넣었다. 그녀는 그 문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바라보며 살아야만 했다.

▲ 인도네시아 친따

“일본에 봉사하고 싶지 않았어요”

친따는 1932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태어나 1945년 14세에 6개월간 동원되었다. 뒤로 보이는 풀숲이 그녀가 고통을 겪었던 위안소 터이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당시의 일이 창피하다고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혼도 안 한 채 계속해서 그 주변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 앞을 오갈 때마다 당시의 고통이되살아 난다고 한다.

▲ 필리핀 루시아

“항상 강간을 당하는 꿈이야”

루시아는 1930년 필리핀 팜팡가에서 태어나 1942년 12세에 2개월간 동원되었다. 그녀뿐 아니라 언니 동생까지 일본군이 수비대로 사용하던 아라얏 중앙학교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했다.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일본어가 나오거나 폭발음이 들릴 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결의 방법이 없다.

▲ 동티모르 이네스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딸을 낳았어요”

이네스는 1930년(추정) 동티모르 베코 에서 태어나 1942년 13세에 2년간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마을로 들어오면서 원주민을 군사도로 만드는 일에 동원했다. 그중 어린 여자 아이를 잡아다 밤에는 성노예로 삼았다. 위안소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임신을 했고 딸을 낳아 집으로 돌아오는 중 일본군은 그 아기를 빼앗아 갔다. 그 이후 아기의 생존여부는 알 수가 없다.

인도네시아 미나 ▲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해요”

미나는 1927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태어나 1942년15세에 2년간 성노예 생활을 했다. 군부대에 동원되어 강간하려는 일본군에 저항을 하자 눈을 맞았다.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고통을 겪었고, 한쪽 눈은 실명이 되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 억울하다. 일본 정부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녀가 나서서 해결할 방법은 없다.

중국 웨이사오란 ▲

“아이가 일본군을 닮았다고 멸시했어”

1920년 중국 광시성에서 태어나 1944년 24세에 3개월간 성노예 생활을 했다. 당시 그녀는 한 살도 안된 딸을 업고 길을 가던 중 일본군에게 잡혀 군대부로 끌려갔다. 3개월만에 도망을 쳤지만, 딸아이는 아파서 죽고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아이는 태어나서도 학교를 갈 수 없었고, 결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살았다.

“이제 나랑 같이 살자”

이수단은 1922년 조선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태어나 1940년 19세부터 5년간 성노예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났지만,그녀는 오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위안소 부근에 남겨졌다.젊어서는 농사일을 하며 살았지만, 자신의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현병과 아기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서 방안에 아기 사진을 붙여두고, 인형을 아기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글, 사진 사진가 안세홍

대학 시절부터는 장애인, 일본군 성노예, 인권 등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1996년부터는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에서 현지 피해 여성 140여 명을 기록하고 있다. 2012년에는 일본 도쿄 니콘살롱에서 피해 여성들의 사진전을 진행하였으나 니콘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지되기도 하였다. 피해 여성들의 기록과 지원을 위한 ‘겹겹프로젝트(JUJU project)’를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하며 사진으로 사람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며 공공예술로써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실마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한국, 미국, 독일 등지에서 50여 회 이상의 사진전을 개최하고 강연회 등을 하고 있으며 일본비주얼저널리스트협회(JVJA)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눈 밖에 나다」,「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한국과 일본), 「〈자숙 사회〉극복,’ 위안부’ 사진전 중지 사건과 ‘표현의 자유’」 (일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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