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 주는 큐레이터
지천에 좋은 갤러리가 즐비한 문화와 예술의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도, 밖에 나가 작품을 즐기며 고급 인프라를 누리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교통, 날씨, 바쁜 스케줄, 컨디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이렇게 추운 겨울엔 더 그러하다. 여기 독립 큐레이터로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전문가가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찾아가는 전시, 즉 전시회를 가지 않고도 글과 사진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맘앤아이의 ‘그림 읽어 주는 큐레이터’를 통해 편안하게 집에서 그림들을 감상해 보자. 오늘의 전시회는, 지난달 소개한 그룹 전시회 “바람”에 함께했던 강종숙 작가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겨울은 언제 지나가나.’ 하고 기다렸는데, 3월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 속에 개나리, 진달래가 피는 듯합니다. 지난달 설명 드린 전시회 이야기를 읽고 나신 후에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좀 되셨는지요? 약간의 궁금증과 상상력도 생겼기를 바랍니다. ‘미술 작가’는 ‘미술품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미술을 한다고 모두 작가는 아닙니다. 작가의 가치관, 철학관 그리고 이론적인 면과 감성적인 부분을 잘 풀어서 개념적인 작품으로 창조해 내는 사람을 작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창조물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단순 재료로 만든 작품이라도 작가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작가의 정신이라는 에너지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들의 작품 속으로 옮겨 갔다가 더 큰 에너지가 되어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으로 전해집니다. 작가의 역량에 따라 에너지의 크기도 달라지고, 이는 작가의 마인드라고 하는 작가 정신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그럼 강종숙 작가의 작품부터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세라믹 사과 설치 작가로 잘 알려진 강종숙 작가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으로 조부모님의 선산이 오랜 도자기 가마터여서 자연스레 도자기에 둘러 쌓여 자랐습니다. 결혼 후 진학한 서울과학기술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여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9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저지 몬클레어 주립 대학원에서 다시 학사 학위를 받았지요. 이렇게 학위를 받는 과정들을 통해 뉴욕의 주요 한인 도예가로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흔히들 도자기, 하면 달 항아리 같은 항아리나 머그잔, 뚝배기 등 식기 같은 생활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강종숙 작가의 작품은 한국의 5천 년 전통의 도예 문화에 깃든 동양적 사상에 서구의 시각적인 표현 효과를 결합한 도예 조각이라는 장르로 현대미술의 한 장을 차지합니다. 뉴욕 하몬드 뮤지엄, 뉴욕 클레이 아트센터, 다이치 갤러리, 뉴욕 통인 갤러리, 버겐 예술 & 과학 뮤지엄, 블라티슬라바 뮤지엄, 몬클레어 주립대 미술관 등에서 열렸던 9번의 개인전을 통해 보여지는 작품의 변천사는 작가의 신중함과 작품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삶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초기 작품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은 채석장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바위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의 단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로, 버려진 바위들이 작가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재탄생하여 마치 석기시대의 스톤헨지를 마주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산에서 주워 온 큰 돌 하나 툭 던져 놓은 듯 창 밖의 자연을 집 안에 들여 놓은 것처럼 친환경적이며, 자연적인 형상과 흙이라는 소재가 따듯한 질감을 주는 조각품입니다. 이 작품들은 물레나 어떤 기구들을 사용하기보다는 손으로 빚어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운 작품들로서, 손맛과 함께 가마 속에서 생기는 우연한 변수가 어우러지며 자연스러움이 강조됐습니다.



90년대 중반 작품 “Burgeoning” 연작은 제목 “급증한다”라는 뜻처럼 똑같은 모양의 장식들이 반복되며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 작품은 한 달간 슬로바키아에서 6명의 도자기 조각 작가들과 워크숍 기간 중 먹었던 배추 크기만한 피망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절단면의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것의 반복 속에서 묘한 매력이 전해지는 것이 위로 쌓아 올리면 탑 같기도 하고,긴 줄에 꿴 듯 설치를 하면 동물의 뼈 같기도, 둥근 유리판에 층층이 쌓아 올리면 분수 같기도, 그리고 뺑 둘러 원형으로 설치를 하면 바다 생물체 같기도 해서 여러 가지의 느낌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도예 조각가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동양과 서양의 도예 조각 작가들을 직접 연구하고 발굴하여 도예 조각가의 울타리를 만들고, 1999년부터 2014년까지 2년마다 도예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알리는 “동서양 도예 조각 전시” (The East & West Clay Work Exhibition)를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 미술관, 뉴욕 헌터돈 뮤지움, 첼시의 갤러리, 일본의 마쉬코 등지에서 개최하여 도예 조각이라는 장르를 알리고 구축하는일에 열성을 다하였습니다.

“Burgeoning(급증)” 작품과 “Germination(생: 발아)” 작품은 같은 시기의 작품들로, 형태는 다르지만 이때부터 반복적인 요소가 증식되어 커다란 군집을 이루는 설치 작품의 초기 단계입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하여 “불의 예술”이라는 전통적 기본을 바탕으로 불과 유약 처리에 의해 표현할 수 있는 질감 표현과 인체적 표정 연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손으로 빚어 올리는 코일링(Coiling)기법으로 곡선과 형상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흙의 특성인 따듯한 질감을 최대한 표현하였지요. 인체 형상은 원시시대부터 조형 요소로 끊임 없는 관심을 받은 소재인데, 강종숙 작가는 “생: 발아” 시리즈를 통해 인간 내면에 내재된 군상을 작품화하여 용감한 생명의 씨앗으로서의 인간 삶의 과정을 옮겨 놓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Meditation 작품 시리즈로, 예전 작업들이 바위 조각 같다면 그에 비해 유약과 색채 처리가 아주 세련되어 잘 다듬어진 대리석 같은 느낌입니다. 곡선과는 달리 평평한 절단면에서는 평형감, 무게감 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이 시기부터 메디테이션과 힐링의 작품들이 연작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작품은 평면과 곡선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살린 Big Apple이라는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Big Apple Series
중량감 나가는 대형 작품을 작업하던 강 작가가 2010년 이후 어깨를 다치면서 작가의 환경과 상황에 맞게 이장 토(흙 슬립)를 가볍고 얇게 캐스팅을 떠서 최 경량으로 설치하는 빅애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평면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형에 색과 선 그리고 빛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공존하지요. 이 시기 애플들은 아크릴 박스에 설치하여 벽에 걸었고, 빛에 의해 아크릴 박스가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 형상과 그림자가 사과의 곡선과 조화를 이루어 내는 작업들입니다.




부상으로 인해 신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우울했던 시기였지만, 이 시기가 없었다면 이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로서 더 많이 생각하고 가치관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리 와이어를 겹겹이 위빙한 작품은, 여러 갈래로 겹겹이 쳐진 와이어를 통해 작가의 인생을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큰 위안과 힐링을 얻습니다. 꽃을 꽂으면 꽃병이요 물을 담으면 물동이가 되듯, 어떤 물체가 담기느냐에 따라 그릇의 용도는 정해지지요. 작가의 인생에 어떤 생각이 담겨야 대중성에 타협하지 않는 좋은 작가가 될까요? 빛을 만들어 내는 금, 은, 동 3색의 와이어를 사용하여 작가의 생각과 인생관을 담은 작품입니다.


사과 설치 작업 역시 메디테이션 작업의 연장으로서, 큰 작업 대신 캐스팅하여 얇고 가벼운 도자기 사과 설치로 얼마든지 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업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에 가마에 구어 낼 수 있는 사과의 수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10년 세월에 걸쳐 만들어 낸 사과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작품이지요. 시간성이 함께 동반되어 무게 감과 깊이 있는 에너지를 내재한 작품입니다.
사과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와이어 작업을 하던 시기,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맨해튼 이미지 작업 입니다. 아직 미발표 작업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얇게 빚어 구워 낸 피스를 겹겹이 쌓아 올린 후 LED의 빛을 첨가하여 멋진 맨해튼의 야경을 만들어 내는 작업입니다. 메디테이션 작업들을 하며 고통을 인내로 잊었고, 그 시간을 통해 힐링하였고, 메디테이션을 갖게 됐기에, 이 작품들은 말 못할 고충을 속으로 삭인 결과물들입니다. 그 시간이 작가를 강하고 큰 작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닐는지요.
이렇듯 한 작가의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여러 작품을 거쳐 현재의 작업으로 발전되고 연결되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을 해 온 긴 시간을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작가를 정확히 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늘 제 이야기로 강종숙 도예 조각가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강종숙 작가는 2001년부터 뉴저지 포트리에 작업실 겸 도자기 공방인 “Tobang Ceramic Studio(토방)”를 열어 대중에게 도예 조각을 알리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의 소재나 주제는 그 생활 속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작품 속에 작가의 생각이나 생활이 반영되고 작품이 작가를 대변하는 자화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을 나타내 줄 수 있는 자화상을 한번 찾아 나가 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편에는 두 번째 작가로 최성호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Curator 고수정
예원학교, 서울예고,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서 피아노 전공 후 연주자의 길을 걸었으나, 미술에 매료되어 뒤늦게 탈리아 브라호플러스 박사(뉴욕 텐리 갤러리 전시 디렉터, 미술사 교수, 미술 평론가)의 인턴으로 큐레이터의 길을 시작했다. 이후 탈리아 박사의 지지로 2009년 인천 여성 비엔날레와 2011년 소피아 국제 종이아트 비엔날레 기획에 참여하였고 텐리 갤러리, 첼시의 엘가 윔머 갤러리, 유럽의 뮤지엄 등에 한인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했다. 2015년 첼시에 갤러리를 오픈하여 한인 작가들을 뉴욕에 알리는 일을 해왔다. 2018년부터 뉴저지 한인동포회관의 갤러리 디렉터로서 음악과 미술을 함께 소개해 왔으나, 올해부터는 리틀 페리에 위치한 한인 비영리기관인 패밀리터치에서 한인사회에 좋은 음악과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봉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