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이야기를 만났을 때
글 Windy Lee 에디터
1920년, 맨해튼에 세워진 풀러 빌딩은 강철 구조의 삼각형 형태로 된 22층 높이의 빌딩이었다. 그 모양이 다리미를 닮았다 하여 일명 다리미, 플랫아이언 빌딩이란 별명이 붙었다. 당대에는 초고층이자 독특한 형태로 플랫아이언 빌딩은 금새 유명해졌지만, 동시에 행인들의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나치게 폭이 좁고 높아 위태로워 보였는 데다, 좁은 협곡을 지날 때나 만들어지는 강한 돌풍 같은 ‘빌딩풍’이 수시로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항상 중절모를 눌러 쓴 멋진 신사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빌딩풍’으로 인해 그곳을 지나던 아가씨들의 치마가 휙휙 올라가는 걸 종종 볼 수 있던 명소(?)여서 그랬다는 건축 야사가 전해온다. 다소 밋밋해 보이는 뉴욕의 건축물들은 유럽의 건축물과 달리 플렛아이언 빌딩처럼 100년이 채 안 된 믿을 만(?)하고 따끈따끈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 알수록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콘텐츠가 화두인 이 세대에 건축물의 예술성을 양식과 형태로만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시대와 대중의 역사를 품으며 변화를 거듭해온, 우리들의 일상에 예술 작품,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보았다.
브로드웨이와 타임스퀘어가 자리한 맨해튼 42번가의 분주한 서쪽과 비교하면 동쪽은 차분하고 한적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100년의 역사 속에 매일 수십만 명의 통근자들과 함께해온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숨은 면면은 절대 조용하지 않다. 최근, 지하 14층에 LIRR역을 오픈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르고 긴 에스컬레이터와 세계적인 아티스트 키키 스미스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까지 갖게 되어 이 건축물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품게 되었다.
1913년에 문을 연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미국 철도 역사상 황금기에 지어진 건물답게 웅장하고 클래식한 자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미네르바, 헤라클레스, 머큐리 조각상과 세계에서 가장 큰 티파니 유리로 만든 시계를 갖춘 아름다운 보자르 양식의 이 랜드마크는, 일일 평균 승객 75만 명, 52개의 플랫폼, 75개의 선로를 보유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역으로 알려져 있다. 플랫아이언 빌딩과 같은 대부분의 뉴욕 랜드마크처럼 지난 세기 동안 이 건물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으며, 그 시간 속에는 흥미롭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터미널은 세 번째 재건축된 건물이다. 인구 증가로 인해 1871년에 세워진 원래 역이 철거되었고, 이후 설계 결함으로 치명적 사고가 여러 번 발생하자 1905년에 다시 철거되어, 1913년에 지금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로 재건되었다.
이 역에는 숨은 공간들이 많았는데, 우선 지도나 청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M42로 알려진 극비 공간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스러운 역할이 수행되던 곳으로 지금은 역의 모든 전기를 공급하는 컨버터가 있다고 한다. 또한 처음에는 화물 운반용으로 건설된 비밀 선로도 역 깊숙이 숨겨져 있는데, 이 선로는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에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연결되는 VIP 전용 선로로 개조되어 사용되었고, 현재도 이용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 속에 지금은 역 쪽 통로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39에서 42 트랙 근처에 위치한 빌트모어 룸은 일명 ‘키스룸’으로 불리었는데, 세계 대전 당시 전장에 나가는 장병들과 연인들의 로맨틱하고도 슬픈 이별의 순간들이 담긴 공간이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는 과거의 숨겨진 공간들이 현재는 대중에게 개방돼 사용되는 곳들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곳이 실내 테니스 코트와 캠벨 아파트먼트 바이다. 별관 4층에 위치한 작은 실내 테니스 코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에게 개방 전까지 비밀스럽게 소유하며 이용했던 곳이다. 과거 뉴욕 상류 사회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역 내의 숨은 바(Bar)인, 캠벨 아파트먼트는, 한때 사업가였던 존 C. 캠벨의 소유였는데 지금은 뉴욕커들이 사랑하는 비밀 바로 유명하다. 또한 테니스 코트 사진에서도 보이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상징적인 아치형 창문 안쪽에는 창문을 통과하는 콘크리트 블록 유리 통로가 있다. 터미널 메인 홀에서 오랫동안 그 창문을 지켜보면, 마치 마법처럼 거대한 창문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사람을 행운처럼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은 허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는 곳으로, 그랜드 센트럴 위의 사무실들을 연결하여 직원들이 번잡한 터미널을 걸어서 다닐 필요가 없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이 역의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는 역 메인 홀 천장을 장식한 금빛의 별자리가 하늘과 땅의 시점에서 뒤섞여 전반적으로 거꾸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또한 한 세기 동안 매일 통근자들이 내뿜는 니코틴과 타르로 까맣게 변한 천장이 재클린 여사에 주도 아래 레몬 수로 기적적으로 복원되었는데, 금연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벽돌 한 부분을 새까만 채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또한 98년도에 복원을 마친 이 천장에는 2,500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가 물감이 아닌 23K 금으로 그려져 있다. 천장 아래 홀 중앙의 안내 데스크 위에는 2천만 달러 상당의 오팔로 만든 시계가 있으며, 부스 내부에는 원통형의 황동 컨테이너로 가려진 비밀 강철 계단이 아래층 안내 부스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은 지하에 위치한 오이스터 바 앞에 숨겨져 있다. 곡선형 천장으로 연결되어 50피트 정도 떨어진 4개의 아치 벽에서는 반대편 기둥에서 속삭이듯 이야기해도 완벽하게 들리는 ‘속삭이는 갤러리’가 있어 인기다. 또한 뉴욕의 랜드마크답게 ‘미드나잇 런’, ‘코튼 클럽’, ‘더 피셔 킹’, ‘마다가스카’, ‘나는 전설이다’, ‘맨 인 블랙’, ‘아마게돈’, ‘어벤져스’, ‘존 윅3’ 등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흔히 지나쳤던 일상 속 건축물 하나에도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는 “역사는 책으로도 쓸 수 있지만, 건축으로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은 형식으로도 쓸 수 있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야기로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시작으로 흔히 보던 일상 속의 건축물들의 숨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찾아보면 어떨까? 일상의 재발견은 분명 일상 속의 활력을 주는 짧은 여행이자 멋진 예술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