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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연주 Jazz Saxophonist 양현욱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뉴저지 J 카페에서 재즈 색소포니스트(Jazz Saxophonist) 양현욱 씨를 기다렸다. 평일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카페 안에는 재즈 마니아들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곧 연주를 시작하려는지 몇몇 뮤지션들이 무대 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객석 조명이 잦아들면서 잔잔한 블루스 리듬이 흘러 나왔다.

스틱 두 개를 바투 잡은 드러머가 가볍게 시작 리듬을 알리자 이내 사람 키만한 콘트라베이스와 코너에 길게 자리잡은 피아노가 함께 잼을 하기 시작한다. 적막하던 카페 안이 순식간에 재즈 선율로 가득 채워지고 어느 틈엔가 금빛 알토 색소폰을 목에 둘러멘 양현욱 씨가 무대 중앙에 서 있다. 꾸밈없이 털털하고 친근한 그의 외모만큼이나 덧칠 없는 진솔한 음악을 이제 우리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인생은 재즈처럼
어린 시절엔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성장하면서 더러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현욱 씨는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뮤지션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고 다른 생각, 다른 길은 단 한 번도 꿈꿔 보지 않았다. 말하자면 태생부터 뮤지션이었던 셈이다. 무용을 전공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이었을까? 일찍이 예술적 소양을 지녔던 어린 현욱 씨는 책보다 악기를 더 좋아했고, 주전자 물이 끓는 소리에 맞춰 장단을 두들기며 음악과 점점 더 친숙해져 갔다. 그러다 백건우 씨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소망하셨던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피아노는 녹록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현욱 씨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에는 잘 맞지 않는 악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관악기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음악 외에는 달리 그 어떤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유년기가 그렇게 지나갔다.

나이 스물 하나가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레슨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푼돈을 벌어 중고 악기도 사고 어렵게 레슨도 받았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자리를 찾아다녔고 어쩔 수 없이 레슨을 중단해야만 했다. 순탄치 않은 삶이 이어졌지만 음악에 대한 열망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현욱 씨를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 그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고, 그해 서울예전(Seoul Institute of The Arts) 실용음악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게 된다. 워낙 재능이 출중했던 터라 진학과 동시에 곧바로 프로뮤지션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때 만난 동기생이 가수 김범수, 그리고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다.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현욱 씨의 어릴적 꿈은 고단했던 삶의 여정들을 묵묵히 지나, 마치 재즈의 Improvisation(즉흥연주)처럼 그렇게 유연하고 자유롭게 흘러갔다.

살며, 공부하며, 연주하며
현욱 씨 나이 스물 한 살이 되던 해에 이문세 밴드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 생활이 시작되었다. 뒤돌아 볼 틈도 없이 라이브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음악에 묻혀 지냈다. 그러던 중, 지오디(GOD)의 재결합 공연에서 색소폰 솔로를 담당하게 되며 13회까지 이어지는 콘서트 투어를 함께 다녔다. 당시 지오디 콘서트장은 매번 십만 명이 넘는 관중들로 넘쳐났는데, 대니, 손호영, 김태우와 함께했던 지오디 LA공연 때는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 때문에 이어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모니터 없이 그저 느낌만으로 연주를 해야 했다. 공연 횟수가 쌓여갈수록 재미난 해프닝도 많아졌다.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면 한국에서 열린 뮤지컬 공연 중 까다로운 박자 때문에 혼잣말로 투덜댔는데, 마침 색소폰에 달린 핀마이크가 켜져 있어서 그의 푸념이 스태프들한테 고스란히 전해지고 덕분에 된통 핀잔을 듣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아이패드를 이용해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패드가 꺼져서 멜로디를 이어가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해프닝이 쌓여갈수록 그의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는 점점더 단단해져 갔다.

 

장학생으로 석사까지 마친 뉴욕에서의 유학생활

그러나 현욱 씨는 한국 가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음악에 안주하는 게 싫어서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브룩클린에 있는 음악대학(Brooklyn Conservatory of Music)에 재즈 퍼포먼스를 지원했는데, 뜻하지 않게 오디션에서 1등을 하면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다시 뉴욕 퍼처스 대학(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urchase College)에서 재즈학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아 다시 뉴욕 퀸스 칼리지(City of New York College)에서 재즈 석사를 마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와 정신없이 공부에만 매진하느라 한국에서 얼마나 편하고 호화롭게 연주활동을 했는지는 잠시 잊었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안정적이지 못한 생활환경이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물론 레슨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는 있겠지만 레슨 때문에 음악에 몰두해야 할 시간을 잃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잃은 만큼 얻은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비록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훌륭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배우고 익힌 그의 음악적 견문이나 지식은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었고, 학문과 실전에서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양현석 씨만의 독특한 연주와 색깔을 빚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애환을 아우르며 소통하는 연주
16년 뮤지션 생활을 돌아보는 그는 이제 양현욱만의 고유한 음악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음악적 철학은 간결하다. 어렵고 난해한 재즈가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음악, 그리고 감동이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디지털 음이 화려한 실험적 음악이 아니라 피아노, 드럼, 베이스만으로도 충분한 어쿠스틱 뮤직, 마치 소탈하고 수더분한 그의 외모처럼 가식이나 덧칠 없이 진솔한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현학적인 음악이 아니라 음악이 주는 순수한 설렘, 그러면서도 가슴 밑바닥에 쌓아둔 깊은 애환이나 한을 위로해 주는 Soul이 담긴 연주를 하고 싶단다.

또한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국한하지 않고 한국으로도 자주 오가면서, 무대의 규모나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관객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언제 어디서든 색소폰을 연주하겠다는 겸손한 다짐도 잊지 않았다.

소통하는 관객이 있기에 나의 연주는 계속된다
관객을 생각하지 않는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경험이 풍부한 연주자라 할지라도 관객 없는 연주자는 존재가치가 없다. 진정한 퍼포먼스의 메카니즘은 바로 그런 것이다. 뮤지션은 연주로 말을 걸고, 청중은 감동과 공감으로 화답하며 서로 소통하는 것, 색소포니스트 양현석 씨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음악도 바로 그런 것이다.

카페 안에는 어느덧 현욱 씨가 연주하는 Ray Charles의 Georgia on my mind가 흘러 나왔다. 창밖은 겨울 한기에 얼어붙어 있지만, 그의 연주는 듣는 이의 귀를 녹이고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 주었다. Soul 음악의 창시자 Ray Charles의 영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애절한 색소폰 소리에서 재즈 색소포니스트 양현욱 씨의 삶과 음악이 고스란히전해지고 있었다.

By | 2017-03-23T16:31:00+00:00 March 23rd, 2017|Categories: People, Special Interview, Uncategorized|Comments Off on 따뜻한 연주 Jazz Saxophonist 양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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